organizer53 2024. 2. 20. 17:30

1. 이승만 정부 : 대한민국 초대 정부 수립

  • 이승만 정부는 제헌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지속된 첫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2. 이승만 정부의 정책

  • 제헌헌법에 따르면, 자유경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으나, 사회정의와 균등경제 정신에 입각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이 노동자에게 이익 균점권을 보장하도록 하였으며 자연력, 공공성을 가지는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두며 긴급상황에 한해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할 수 있도록 명시되었다.
  • 또한 정부조직법을 통해 국무총리 직속에 예산 편성 사무를 담당하는 기획처를 신설하고 국무회의에 제출하는 종합적 계획안을 세우도록 하였다.
  • 이승만 행정부는 조봉암, 이순탁 등 중도계열 인사를 농림부, 기획부에 중용하여 농지개혁과 산업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에 농림부는 지주의 전업을 보장하여 소유한 자본이 중소기업에 투자되기로 유도함으로써 농촌 집중으로 인한 토지 영세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기획부는 산업부흥 5개년계획과 이를 뒷받침하는 물동 5개년계획을 마련하였다.

출처 : 나무위키

 

3. 긍정적 평가

가. 독립운동가

  • 장면은 "이 박사 밑에 국무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고 평가하였다.
  • 허정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 며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 고 평하였다. 또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 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나. 농지개혁법 시행

  • 농지개혁법은 일제강점기의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사회를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꾸는 혁명적인 계기로 평가된다.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요소는 사라지고 지주 대신 자본가가 새로운 경제의 주역으로 급성장하였다. 자기 땅을 일구게 된 농가에서는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미래의 노동자들이 배출됐다.
  • 또한 6.25 전쟁 중 남한에 공산주의가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였다. '토지개혁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 김 일영 교수는 "농지를 받은 농민은 이승만의 지지기반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구성원으로 포섭되었다”며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든 첫째 계기가 농지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된 소작농들은 한국전쟁 동안 북한의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충실히 남을 수 있었다.
  • 농지개혁이 만약 개정이 안 되었다면 한국전쟁때 수 많은 농민들이 북한의 토지배분 선전에 넘어가 북한편으로 붙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때문에 농지개혁법은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농지개혁법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이 다 했지 이승만은 한 거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봉암을 자리에 앉힌 것이 이승만이니 그의 치적에 역시나 포함된다. 다만, 제대로 법제화가 되기 전에 이미 농촌 수준에서 밀어붙였던 것은 상당한 의의가 있었다.


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 2020년 기준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제2의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약의 가장 큰 목적인 전쟁 방지를 이뤄낸 것이다. 여기에 국방 역량을 미군이 부담하여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에 그만큼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의도 존재한다. 즉, 산업화를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하여 이후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공신이라고 볼 수 있다. 
  • 한국은 안보적 위기가 높은 국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GDP 대비 국방비 지출은 3% 미만으로 세계 평균과 그리 차이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매년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예산절감 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항시 전쟁 재발의 위험이 존재하는 한반도에 '미국이 전쟁을 막아준다.'라는 안정감을 제공함으로써 일명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억제하여 해외 투자자금의 안정적 유치에 크게 기여해 왔다.
  • 역으로 북한 입장에서는 적화통일을 좌절시킨 근원이라 볼 수 있다. 휴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의 군사적 보호를 담보하여 북한 수뇌부의 침략 의지를 무력화시켰다. 그래서 북한 정권과 종북주의자들이 빼놓지 않고 외치는 요구사항 중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폐기'가 있는 것이다.

라. 대통령 직접선거제 도입

  • 비록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 무리가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의 손으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를 최초로 마련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지난 총선에서 야당이 다수당이 되어 간선제하에서 직선제로의 개헌은 임기연장의 수단으로 볼 수 도 있는 부분이 있어 이를 긍정적 평가로 보기에는 어렵다.
  • 1952년 7월 4일 몇몇 발췌개헌안 반대 의원들이 국회 불출석을 선언한 가운데, 군경들은 무력충돌에 대비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였다. 국회의원 총 210석 중 166명이 출석한 가운데 기립투표 결과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고, 7월 7일 공포하였다.

     

마. 자유민주주의자

  • 1991년의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윤치영은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라고 평하였다.
  • Students for Liberty(SFL: 자유를 위한 학생들) 한국지부 전계운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주의를 품으며 자유민주제도를 통한 대한민국의 번영을 꿈꾸었다고 평했다. 민족주의가 한국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인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함으로써 눈부신 번영을 이루어 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부연 설명을 그 평가 다음에 덧붙였다.

     

바. 문맹 퇴치와 초등 의무교육 도입

  • 문맹을 퇴치하고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그었다는 평가가 있다. 
    1954년부터 문해교육 정책, 문맹퇴치 5개년 사업 등을 진행하여 문맹률을 1945년 78%에서 1958년 4.1%로 급감시켰다. 1954년부터 취학률을 70% 수준에서 95%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초등 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을 실시하고 교육예산 약 80%를 의무교육비에 배정할 정도로 주력했다. 총 학령아동의 취학률은 1957년 90%를 넘겼고, 1959년에는 96% 목표를 달성하였다.


사. 개신교의 전파

  • 역사학자 이주영은 그를 윤치호와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했다. 이주영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의 미성숙으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개인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유선거제도의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

    출 처 : 위키백과 


아. 기타의 긍정적인 영향  

  •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나아가야 할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통한 민주적 자본주의 산업강국의 건설을 위해 초석을 놓았고 이를 위한 포석을 놓았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이를 위해 외교면에서 대체로 옳은 방향으로 기초를 잡은 점이 있다.
  • 또한 수십년간 국내를 떠나 있었던 탓에 내치나 조직 운영에는 좀 미숙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외교 감각을 지녔던 이승만이 외교를 잘한 측면이 많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확실하게 작전권을 넘겨버려서 미국 혹은 UN군이 발을 빼는 건 원천봉쇄하다시피 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시에도 미국과 의회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입장에서 반공포로 석방 사건 같은 벼랑끝 전술로 아이젠하워 정부의 당면 목표였던 휴전을 훼방놓는 입장을 불사하며 체결을 성공하였다. 이걸로 모자라 아예 미군을 서울과 근교에 잡아두어, 북한이 남침한다면 미본토에서 위원회 통과다 의회 승인, 비준이다 하기도 전에 미군과 교전하지 않을 수 없어 자동으로 미군을 참전하게 하는 장치까지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이걸 자주 입장에서 비판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는 데 문제는 이승만은 청년시절에 대한제국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자기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도 이번에는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결국 이를 성공시켰다. 또한 주한미군이 남한에 있듯이 중국군이 북한에 남겠다는 주장도 개소리 말라면서 철회시킨 것도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 이승만 정부의 최대의 의의는 대한민국이 미국과 동맹한 서방 자본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었지만, 포석 면에서 올바른 방향이었고, 이 구도하에서 이루어진 국력 향상의 혜택을 후손들이 보고 있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뒤쳐져,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했던 대한민국에게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북한 뿐만 아니라 중, 소, 일로부터도 체제를 안정시켜 주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군사비 부담을 대폭 경감하여 결과가 증명하듯이 세계 유수의 산업강국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 다만 친미 외교노선에 대해서 단순히 친미적이었다고만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의 친미 노선은 35년이 넘는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통치에서 막 벗어나고, 이후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된 그야말로 최악의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승만 대통령 본인도 '한국의 생존을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친미일 수 있어도, '미국의 뜻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의미에서의 친미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만은 자신의 전생애를 통틀어 미국과 마찰을 빚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이전의 여러 남침 징후를 무시하고, 에치슨 선언에다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미적지근했던 미국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키며 미국 대사에게 빨리 미군 참전 안시키면 남한에 있는 미국 민간인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깡을 부리기도 하였다. 반공포로 석방 사건만 해도 미국을 제대로 물먹인 사건이라서 미국에서 길길이 날뛰었고 처칠도 열받아서 저런 인간이 통치하는 땅 지켜줄 필요없으니 영국군을 철수시키자는 주장까지 했다. 미국 정부도 멋대로 구는 이승만을 몰아내는 쿠데타까지 획책했었다. 종이 위의 구상에서 그쳤지만.
  • 독립운동 시기부터 꾸준하게 반공사상을 주창해왔고, 이로 인해 미 군정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북한은 정부 명칭만 가지지 않았지, 해방 이후 소련의 주둔 아래에 1946년 3월 민주개혁을 주창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했고, 1946년 11월 도, 시, 군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1947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런 위협 속에서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이승만은 정치 분야에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물론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전제적인 권위주의적 통치를 했고, 3.15 부정선거와 같은 오점을 남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치제도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확립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제를 모방한 나라로 만들었다.
  • 요약하자면 구한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단순히 국제법이나 이상주의적인 시각으로는 국가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온갖 정치적 공작을 통해서 미국을 잡아두어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했고 이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교로 미국을 잡아두고 안으로는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등 내치는 최악이었다.
  • 또하나 대표적인 예로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미군은 구 일본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구상했는데, 이승만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 일본군은 공산군과 싸우기 전에 먼저 한국군부터 싸워야 할 것이라고 반대했고 뒤이어 중공군의 공세가 좌절되자 결국 무산되었다. 물론 해양순찰이나 기뢰제거에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 몰래 일본군 출신을 투입시킨 사실은 있지만 이 때도 일본군으로 한국 영토에 상륙시키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본군 출신이고, 미군에 소속된 특별부대의 형태였다.

     
    출 처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