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당대표 3관왕 장수생, 안철수
좌우 넘나들며 ‘당 대표 3관왕’에 도전하는 ‘장수생’ 안철수[황형준의 법정모독]
황형준기자입력 2023. 2. 17. 12:00
“하루에 사람이 집중해서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이 보통 3시간밖에 안 된다. 공부도 하루 종일 하는데 3시간 집중해서 할 수 있는 학생은 드물다. 하루 3시간 1년이면 1000시간. 매일 3시간 집중해서 노력하면 10년 걸리는 거다. 집중해서 1만 시간 정도 하면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2017년 6월 한 강연회에서 맬컴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인용해 이같이 10년과 1만 시간의 법칙을 강조했다. 의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벤처기업가, 대학교수에 이어 정치인이란 5번째 직업을 가진 지 이제 10년 5개월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법시험 9수를 했지만 안 의원 역시 만만치 않은 ‘정치 장수생’인 셈이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혜성같이 등장해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던 안 의원.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과 새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담긴 ‘안철수 현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현실 정치는 녹록지 않았다. 2012년 9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출사표를 낸 뒤 10년 동안 대선을 3번 치르며 1번은 본선에서 패배했고 2번은 중도 하차했다. 창당만 3번 하는 등 산전수전을 겪었다. 그동안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었던 국민의당,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재창당한 국민의당 등 정당 대표직을 세 번 지냈다.
이제 네 번째로 보수 여당인 국민의힘 대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가 좌우 진영을 넘나드는 당 대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것인지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당 대표에 당선되면 한국 정치사에서 전례 없는 기록이 된다.
● 공익 활동에 관심… 2000년 출마 제의 받곤 “정치가 중요하다”
안 의원은 단국대 의대 교수였던 1990년 처음 언론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나이 28세 때다. 국내 최초로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며 ‘컴퓨터 의사’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 생리학을 전공했고, 의대 본과 2학년 때인 1983년 ‘애플’ 컴퓨터를 구입하면서 컴퓨터에 대해 알게 됐다. 의대 박사과정 시절인 1988년 자신이 갖고 있던 디스켓이 ‘브레인 바이러스’라는 국내 최초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연구를 시작해 치료용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후 7년간 새벽 3시에 일어나 오전 6시까지 하루 3시간씩 백신 개발에 매달리며 낮에는 의사, 밤에는 개발자의 이중생활을 했다.
1995년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현 안랩)를 만들어 V3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신종 컴퓨터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백신 프로그램으로 맞서며 명성을 얻었다. 2000년대 들어 코스닥 상장을 하며 벤처기업가로 거듭났다. 자금난을 겪던 중 100억 원 매각 제안을 받았지만 국가 기간산업이라고 생각해 회사를 해외 자본에 팔지 않는 등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
보폭도 넓어졌다. △1999년 국민은행 사외이사 △2000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컴퓨터수사자문위원 △2001년 벤처기업협회 부회장 △2003년 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 회장 △2001년 김대중 정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등 직함과 네트워크도 늘었다.
그가 언제부터 정치에 뜻을 뒀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어느 정도 정치의 중요성과 현실 정치 참여에 대한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김대중 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가 했던 이야기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인터넷, 전자민주주의 등을 주제로 한 태스크포스(TF)를 하며 안철수 의원과 처음 만났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안 의원과 (MBC 기자이자 앵커였던) 박영선 손석희 엄기영 씨 등이 영입 대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 거절했는데 안 의원은 좀 달랐던 걸로 기억한다. ‘정치가 중요하다. 그런데 잘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뉘앙스였다.” ―취재 메모 중
그 뒤에도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고,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등에도 참여했다.
그는 봉사 및 공익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 의대 재학 시절 본과 2학년부터 4학년까지 3년 동안 서울 구로동과 지방 ‘무의촌’ 등에서 진료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사회가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1년 후배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를 만나 결혼했다.
안랩을 운영하면서도 아름다운재단 등과 함께 물품 등을 기부하고 기부문화 확산과 관련된 활동을 꾸준히 진행했다. 정치 입문에 앞선 2011년 11월엔 자신이 보유한 안랩 지분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동그라미재단이 설립돼 현금 722억 원과 안랩 발행 주식 총수의 약 10%에 해당하는 100만 주를 현물 기부했다. 이후 재단은 기술 연구개발과 창업 등에 20억 원 가까운 사업비를 지원하고 있다(다만, 동그라미재단은 ‘짠 내’가 나고 솔직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존재감이 없다. 빌 게이츠는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에 한화 90조 원에 달하는 700억 달러를 기부하고 연간 8조 원에 달하는 60억 달러 이상 지출하고 있다).
KAIST 석좌교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등 교수로 활동하며 청년들과 함께 미래를 고민했다.
● 스스로 외유내강(外柔內剛)·대기만성(大器晩成)형으로 여겨
2016년 6월 국민의당 대표 사퇴 당일 그의 태도에 대한 일화를 듣고는 외유내강형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당시 측근이 했던 얘기다.
“사퇴한 날 취재기자들이랑 카메라기자들이 2층 대표실부터 엘리베이터, 1층 로비까지 계속 따라붙었잖아. 마지막에 차에 타기 전에 나랑 몇 마디 나눴다. 그때 나한테 한 말이 ‘오후 교문위(당시 상임위) 회의는 어떡하죠?’였어. 그래서 내가 ‘오늘은 좀, (회의에) 나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지. 하여튼 진짜 모범생이야.” ―취재 메모 중
안 의원은 자신의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스스로 ‘외유내강’과 ‘대기만성’형이라고 했다. 그가 강연에서 자주 했던 얘기 중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권투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강한 펀치를 날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강한 펀치를 맞고도 버티는가가 핵심이다. 그게 권투에서 이기는 비결이다. (중략) 시간이 흐르는 걸 x축이라고 하고 그 사람의 진짜 실력을 y축이라고 하자. 보통 열심히 노력하면 그래프로 따지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자기 실력도 (우상향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주위 사람의 평가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조금만 성취해도 주위 사람들이 과대평가한다. 언론에 나올 정도면 과대평가된다. 그러다가 좀 더 지나면 오히려 관심 없어지고 아주 과소평가되는 순간이 온다. 나는 좀 더 실력이 올라갔는데 주위의 평가가 낮아지는 그런 순간이 온다. 처음에 저보다 훨씬 더 능력 있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한 사람씩 낙마하는 거 봤다. 공통점을 보니까 외부 평가가 진짜 자기인 줄 착각하면서 교만해지는 것이다. 외부에서 아주 평가절하되고 과소평가될 때 그 실망감 때문에 너무 절망하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이다. 주위에서 비아냥거려도 그래도 나는 이 정도도 예전보다는 훨씬 더 발전했다고 자기중심을 잡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2016년 7월 ‘알파고와 우리의 미래’ 강연, 취재 메모 중
이런 마인드로 무장한 그는 세간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실제 정치권에 샛별처럼 등장한 인물 중 윤석열 대통령을 제외하면 안 의원처럼 장거리를 뛰고 있는 인사도 없다. 고건 전 국무총리,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 정치 신인은 모두 잠깐 빛나다 스러져 갔다.
● 소명 의식과 책임윤리 갖춘 전문가
정치 입문 10년이 지났지만 그도 정치권에서 최고가 되진 못했다. 본격적인 정치 입문 전 2011년 서울시장 출마 양보, 2012년 대선 후보 단일화와 2014년 신당 추진 등 과정에서 잇따라 물러서면서 그는 ‘또 철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에도 2022년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단일화하고 국민의힘에 입당을 하면서 중도개혁정당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안 의원도 1990년 3당 합당 당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느 곳, 어느 정당에서라도 정치 변화를 이끌고 자신이 구상해온 정책을 만들겠다는 게 안 의원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는 초지일관 정치권의 혁신을 촉구하는 ‘메기’ 역할을 해왔다. 여전히 안 의원은 기성 정치인에 비해 때가 덜 묻고 깨끗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 의원 측 관계자는 “여전히 다른 정치인에 비해 안 의원이 정의와 공정 가치에 걸맞다”라며 “인수위원장을 하면서도 일을 잘한다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미 모든 검증을 다 거쳤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용의 정신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책임질 줄 알았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시절 7·30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김한길 당시 대표와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26.7% 정당 득표율, 의석수 38석을 얻으며 원내 3당에 자리 잡았지만 국민의당 리베이트 사건이 터지고 주요 인물이 구속되자 “정치는 책임지는 것이다”라며 대표직을 던졌다. 2017년 대선 과정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아들과 관련된 제보 조작 사건이 불거지자 7월 대국민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최근 경기 성남시장 시절부터 최측근으로 꼽히던 민주당 정진상 전 대표실 정무조정실장,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구속 기소에도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는 다른 모습이다. 아래는 최근 썼던 칼럼이다.
● ‘미래’ 화두 제시하는 정치인
안 의원은 모범생이다. 선한 인상에 정치인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말씨가 고와 오히려 단점이 될 정도다. 아재개그를 구사하며 활짝 웃는다.
특히 늘 배우는 자세로 공부하는 노력파다. 생리학 박사 출신에 정치인 이전에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를 마쳤고 정치적 휴지기에도 독일 막스플랑크 혁신과경쟁연구소 방문연구원, 미 스탠퍼드대 방문연구원 등을 다녀왔다. 책만 10권 넘게 썼다.
대학 시절부터 영화 감상과 독서가 취미였고 바둑은 아마추어 2단이다. 연구소 대표 시절 마음이 답답할 때 사무실이 있는 서초역 인근에서 삼성역까지 걸었다던 그는 2017년 대선 패배 이후 독일에서 휴지기를 갖던 중 뒤늦게 마라톤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풀코스도 3번이나 완주했다. 2017년 대선 당시 배낭을 메고 걷던 ‘뚜벅이 유세’를 하더니 2020년 총선 기간엔 마라톤 유세를 벌이며 국토 종주를 했다. 정치권에서 유례없는 ‘신공(神功)’이다.
반기문 전 총장의 불출마 등을 맞히며 한때 ‘안스트라다무스(안철수+노스트라다무스)’와 ‘안파고(안철수+알파고)’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도 자기 문제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듯이 자기 미래와 운명은 제대로 예언하지 못했다.
다음 달 8일 치러질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2027년 대선을 향한 그의 길에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국민의힘 당원들은 친윤 후보를 선택하며 윤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줄 것인가, 수도권 대표론을 내세운 안 의원을 사령관으로 뽑을 것인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안철수 마크맨’이던 2016년경 ‘주말에 무엇을 하시냐’고 물었습니다. “넷플릭스를 본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정보기술(IT) 문외한인 기자에게 안 의원이 ‘블라블라’ 설명은 했지만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야기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필자는 공유파일 서비스 등에서 다운로드를 해 영화를 보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몇 년 뒤 넷플릭스는 이미 우리의 안방으로 들어왔고 저도 작년부터 스마트폰으로 넷플릭스를 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졌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정치권에서 몇 안 되는 정책 전문가입니다. 특히 IT에 대한 전문성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라는 화두를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그는 2016년 6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할 수 있게 교육과정이 바뀌어야 한다. 소프트웨어 교육과 코딩 교육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정치권엔 낯선 문장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 초등학교에서부터 코딩 교육은 일반화됐습니다.
이렇게 그는 앞서갔습니다. ‘퍼스트 무버’이자 ‘트렌드 세터’였습니다. 그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다 밝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황형준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