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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MY 시사 특강/20-3. 유튜브 시사 특강

공정한 세상은 공평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 최재천의 아마존

by organizer53 2025. 3. 17.

양심과 사회적 가치: ‘양심 냉장고’에서 공정의 개념까지

1. ‘양심 냉장고’와 정지선을 지킨 사람

1996년에 방영된 양심 냉장고는 단순한 예능이 아니라 교양과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예능이 단순한 재미를 넘어 교양과 도덕을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한국에서는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연간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도로 질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제작진은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사람들이 신호를 잘 지키는지 실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새벽 4시까지 진행된 실험에서 대부분의 운전자는 빨간불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지나쳤고, 제작진은 포기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런데 마침내 한 대의 파란색 티코가 신호를 지키고 정지선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제작진이 달려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운전자는 차분하게 “저는 늘 지켜요”라고 말했다. 그는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다.

이 장면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운전자는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양심’이란 것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2. ‘양심’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이유

과거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양심’이라는 단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단어가 사라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1. 필요가 없어져서 → 사회에서 그 개념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거나 사용될 일이 없을 때
  2.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서 → 기존 개념이 새로운 단어나 표현으로 변경될 때

예를 들어, 과거에는 ‘쓰레기 청소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이후 ‘환경미화원’으로 변화했다. ‘양심’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 걸까?

그런데 놀랍게도 ‘양심’을 대체할 만한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려웠다. 대신, 현대 사회에서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표현 중 하나가 **‘쪽팔리다’**이다.

‘쪽팔리다’라는 표현의 등장

  • ‘쪽’은 충청도 방언으로 ‘얼굴’을 뜻한다.
  • ‘팔리다’는 ‘팔려서 체면이 손상되다’는 의미다.
  • 결국 ‘쪽팔리다’는 ‘부끄럽다, 수치스럽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양심’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 양심은 스스로의 도덕적 기준과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 쪽팔리다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결과일 뿐이다.

즉, 오늘날 ‘양심’이란 개념이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문제다.
양심이 사라지고 ‘쪽팔림’만 남아 있다면, 이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의미한다.

3. 공정함이란 무엇인가?

강연자는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공평 + 양심 = 공정’**이라는 공식을 제안했다.

공평과 공정은 같지 않다.

  • 공평(Equality):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는 것
  • 공정(Equity): 각자의 필요에 맞게 나누어 주는 것

이를 설명하기 위해 흔히 등장하는 야구 경기장 울타리 예시를 보자.

두 가지 그림이 있다.

  1. 첫 번째 그림:
    • 키가 큰 사람, 중간 키의 사람, 키가 작은 사람이 있다.
    • 모두에게 똑같은 크기의 박스를 하나씩 제공한다.
    • 결과적으로, 키가 작은 사람은 여전히 울타리를 넘겨 경기를 볼 수 없다.
    • 이 상태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평’**이다.
  2. 두 번째 그림:
    • 키가 큰 사람이 자신의 박스를 키 작은 사람에게 양보한다.
    •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이 경기를 볼 수 있다.
    • 이것이 **‘공정’**이다.

공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공정’을 외치지만, 실상은 기껏해야 ‘공평’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즉, 모든 사람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면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정은 더 적극적인 노력과 양심의 개입이 필요하다.

  • 양심이 없다면, 가진 자는 계속해서 더 많이 가지려 할 것이고
  • 양보배려가 없다면,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공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똑같이 나누는 것을 넘어서서 ‘누가 더 필요한가?’를 고려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4. 개인적 양심 vs. 사회적 양심

양심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양과 동양이 양심을 다르게 이해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서양의 양심 (Conscience)

  • ‘Con’(함께) + ‘Science’(지식, 인식) → 함께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
  • 사회적 합의를 통해 형성된 도덕적 기준을 의미한다.
  • 법과 규율을 잘 따르는 것이 곧 양심적인 행동이라고 본다.

동양의 양심 (良心)

  • **‘어질고 착한 마음’**을 의미한다.
  • 단순히 법을 따르는 것을 넘어서,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다.
  • 즉, 내면의 도덕적 가치를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지선을 지킨 장애인 운전자의 경우, 서양적 양심을 실천한 사례다.
그는 단순히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인정받고자 했다.

5. 양심이 사라지면 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양심적 행동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 특권층은 자신이 가진 것을 쉽게 내놓지 않는다.
  • 부정한 방법으로 더 많은 이익을 취해도 큰 비난을 받지 않는다.
  • 오히려 비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강연자는 4대강 사업 반대, 호주제 폐지 등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마음속의 ‘양심의 촛불’을 끌 수 없었기 때문이다.

6. 양심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

양심이 사라진 사회는 불평등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다시 양심을 이야기해야 한다.

  • 법과 제도를 넘어선 도덕적 가치의 회복이 필요하다.
  •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 다시금 양심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공론화를 활성화해야 한다.

양심이 사라진 사회는 결국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양심을 이야기하고,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때야말로 건강한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   공정이 어려운 이유, 공정한 세상은 공평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 최재천의 아마존  2025.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