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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시사 Issue 분석/9-1. 대한민국 근대사 (권오중)

8-5-19.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와 북 핵 개발의 원인

by organizer53 2023. 12. 27.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와 북 핵 개발의 원인    권오중 / 2019-02-07 

 

1953 6.25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이후, 이승만은 곧바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외교 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다자간 안보동맹을 통해 공산주의의 침략을 원천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는 포츠담 회담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 H. 트루먼에 의해 시작된 대 공산주의 봉쇄정책, 즉 집단적 안보체제를 통해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미국의 국제적 안보전략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이승만이 미국의 대 공산주의 전략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1949년 미국의 주도로 NATO가 창설되기는 했지만,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 등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비협조로 인하여, NATO는 곧바로 정상궤도에 진입하지 못했다. 또한 대서양 헌장에 의거해 독립을 보장받은 세계 도처의 식민지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선전선동이 침투하며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간의 경계가 모호했기 때문에, 미국은 다자간 안보동맹을 통한 집단적 안보체제를 확산시키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국제 전략에 탄력을 주었던 사건이 바로 6.25 전쟁이었다. 6.25 전쟁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공포를 느꼈던 서유럽의 국가들이 미국 주도의 NATO에 참여하게 되었고, 1945년 이후 독립을 쟁취했던 중동과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중 일부가 빠르게 미국 주도의 다자간 동맹에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6.25 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은 국제법적으로 중립이었던 일본과 독일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 9 8) 그리고 NATO 가입(1955 5 5)을 통해 자유진영으로 편입시켰고, 남동아시아에서 남동아시아 조약기구(SEATO) 1954 9 8일에 창설하였고, 중동지역에 유럽과 남동아시아의 다자간 동맹에 대한 연결고리인 바그다드 조약기구를 1955 11 3일에 창설하면서, 미국과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남하에 대항하는 블록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이 방어 라인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다자간 동맹은 결성되지 못했다. 

 

동아시아 지역의 집단적 안보 동맹기구의 창설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것은 미국이 아니라 이승만이었다. 이미 6.25 전쟁 중이었던 1951 2 2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회를 통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태평양 연안국들의 동맹결성을 결의하도록 했고, 1953 8 8일에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1954년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의 반공 동맹기구 창설을 요구하는 외교 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초기에 이승만이 구상했던 다자간 동맹은 당시에 창설이 논의되고 있었던 SEATO를 확대하여 대한민국과 대만이 포함되는 EATO(동아시아 조약기구)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의 구상을 수용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1) 대만의 참여가 중국을 자극할 수 있었고, 2) 대한민국의 참여는 휴전협정 위반이었으며, 3) 일본의 참여는 일본의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시아의 방위비 분담을 위해 서독처럼 일본의 개헌을 통해서 다자간 동맹기구를 창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 장개석, 마르코스 등은 일본의 참여를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EATO의 창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동아시아의 다자간 안보동맹기구의 결성을 위한 외교 전을 지속했다. 1957년 초에 이승만은 EATO 보다 축소된 형태의 NEATO(북동아시아 조약기구)의 창설을 다시금 요구하기 시작했다. 1957 12월 당시 대한민국의 외무장관 조정환은 NEATO NATO SEATO와 같은 반공 동맹기국의 중요한 축으로 정의하면서 NEATO 창설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NEATO 구상에도 역시 일본은 배제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국제법적으로, 또한 일본이 헌법적으로 다자간 동맹 기구를 결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또한 일본이 개헌을 하더라도 일본의 참여를 반대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대한민국이 포함되는 다자간 안보기구의 창설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승만이 실제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EATO에 이어 NEATO의 창설마저도 거부당하자, 이승만은 그의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58 6 13, 당시 정부의 영자(英字) 기관지인 “The Korean Republic"은 당시 논의 중이었던 주한미군 감축과 관련해서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는 한국의 안보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했다. 사실 다자간 안보동맹 결성과는 별도로 이승만은 6.25 전쟁 직후부터 전술 핵의 한반도 배치를 주장하기는 했었지만, 국제여론과 공산진영의 반발을 의식해서 적극적이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다자간 안보기구 결성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우회적으로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 전술 핵 배치를 결정하도록 외교적 압박을 지속했던 것이다. 실제로 NATO, 바그다드 조약기구, SEATO 등에 지출되는 방위비와 한반도 주둔비까지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안고 있던 미국 정부는 결국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당초 미국정부는 한반도 내의 전술 핵 배치 계획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해 왔었지만, 내부적으로는 1956 11월에 이미 신무기 배치를 결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신무기에 전술 핵이 포함될지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었다.(Memorandum from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Parsons)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Robertson), Washington, November 7. 1956. FRUS, Vol. XXIII, Korea(1955-1957), 345.) 그러나 한반도 내의 전술 핵 배치와 관련해서, 미국 국무성이 대통령의 국가안보특별보좌관이었던 컬터(Culter)에게 보냈던 1957 3 29일자 메모랜덤에서 한반도에 배치될 수 있는 전술 핵의 실체에 대한 윤곽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이 메모랜덤이 정부가 핵 탑재 280mm 대포와 762mm 핵탄두 로켓,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 첨부된 목록에 있는 모든 항목의 무기지원을 허용될 것이다”(Memorandum to President's Special Assistant for National Security Affairs(Culter), Washington, March 29, 1957, FRUS, 위 책, 415~416쪽.) 라고 보고했던 사실에 비추어 여기서 언급된 두 가지 핵탄두 로켓의 한반도 내 배치가 이미 오랜 기간 신중히 고려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6일이 지난 1957 4 4일에 미국 정부의 국가안전보장회의 (NSC)는 갑자기 이 두 가지 무기의 한반도 내 배치와 그 작전권을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부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Memorandum of Discussion at the 318th Meeting of National Security Council, Washington, April 4, 1957, FRUS, 위 책, 420.) 미국정부의 결정이 불과 6일 사이에 번복되었던 것이다. 

 

미국정부의 결정이 이렇게 갑자기 변한 이유는 세계 각 지역의 다자간 안보기구를 비롯해 막대한 안보비용에 재정적 부담이 컸던 점도 있지만, 이승만의 지속적인 압박도 미국의 한반도 안보정책 변화에 의미 있는 작용을 했다. 결국 미국은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로 인하여 한반도에 대한 주둔비와 안보비용을 절감하면서 동아시아의 안보적 세력균형을 이끌어 냈고, 대한민국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므로, 전술 핵 배치는 양국 모두에게 필요했다. 미국의 한반도 내 전술핵 배치가 결정된 이후 당시 대한민국의 국방장관 김영우는 1957 5 15일에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우리는 한국에 신(핵) 무기를 배치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에 매우 기뻐하고 있다라는 감사의 뜻을 전달했고, 이어서 1957 7 17일에 미국 합동참모본부(JCS)도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에 동의했다.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는 명백한 휴전협정 위반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배치 시점은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점은 대략 1957 12월 말에서 1958 1월 초 사이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당시 미국 국방부 차관이었던 퀄레스(Quarles)가 미국 육군 장관이었던 브러커(Brucker)에게 보냈던 1957 12 24일 자 메모랜덤에서 당신에게는 한국으로 'the Honest John 280mm 대포를 도입시키는 권한이 부여되었다...”라고 했는데,(Memorandum from the Deputy Security of Defence(Quales) to the Security of the Army (Brucker), Washington, December 24, 1957, FRUS, 위 책, 532~533.) 이는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가 임박했음을 반증했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58 1 7일에 열린 제91차 판문점 정전회담에서 중국과 북한 측 대표들이 배치된 전술 핵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사실에서 대략의 배치 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미국은 이를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1958 5 15일에 대한민국의 외무부가 주한 외교사절들을 상대로 한 비공식적인 성명을 통해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의 한국 내 핵 미사일 배치를 위한 기지 건설을 환영한다라는 짤막한 입장표명을 통해서도 전술 핵 배치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Politisches Archiv des Auswärtigen Amtes, Referat 710, Bd. 1581, Bericht Hertz, Seoul, 13. 5. 1958.) 그리고 1958 1월 이후, 다자간 안보기구나 전술 핵 배치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요구도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현실적으로 성사가 불가능했던 EATO 그리고 NEATO로 이어지는 다자간 안보기구 결성에 대한 이승만의 압박은 한반도 내에 전술 핵을 배치하기 위한 위장전술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대한민국에 전술 핵 배치를 성사시키며 대한민국의 안보적인 불안함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한편 6.25 전쟁이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형제들의 전폭적인 복구지원으로 빠르게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전후복구를 달성했던 북한이 1959년부터 갑자기 자주국방을 운운하며,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에 접해 있었던 소련과 중국은 전술 핵을 북한에 배치할 필요가 없었고, 북한 지역 내에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전술 핵이 없었던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배치된 전술 핵에 큰 위협을 느꼈다. 당시에는 안보적 위협에 따른 핵 개발이었지만, 6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현재에는 연방제 통일론에 이어서 체제보장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북한 정권은 전술 핵의 개발에 전력을 기울여왔다.

 

 

권오중 /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독일 마부르크대학교에서 현대사, 사회경제사, 정치학을 전공했다. 「분단국의 정치」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서독의 NATO 가입과 SEATO의 창설 그리고 한국 내 핵무기 배치를 통한 미국의 봉쇄적 안보정책 1949~1958」 등 다수의 논문들을 통해 독일과 한국의 분단 문제를 외교사적 관점에서 풀어냈다. 한국외대와 경희대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육종합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임했었다. 현재는 ()외교국방연구소에 연구실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