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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政治)를 정리(整理)해 드립니다
4. 이념의 갈등, 진영 논리로 양극화된 대한민국/4-1.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이승만 초대정권

4-1-5.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by organizer53 2024. 7. 13.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약칭 반민규명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2004년 3월 22일 공포되면서 이 법률의 시행령에 따라 2005년 5월 31일 대통령 소속으로 발족한 기구이다. 초대 위원장은 강만길이 맡았으며, 2008년부터 성대경 전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역임했다.
  • 반민규명위는 일제 강점기를 △제1기(1904년 러일 전쟁 ~ 1919년 3·1 운동) △제2기(1919년 3·1 운동 ~ 1937년 중일 전쟁) △제3기(1937년 중일 전쟁 ~ 1945년 해방) 세 부분으로 나눠 친일반민족행위 대상자를 조사해왔다. 2009년 11월 27일, 반민규명위는 제3기 친일반민족행위자(1937년 중일 전쟁 ~ 1945년 해방) 705인 명단을 발표한 이후 해단식을 가졌으며,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4년간의 임무를 완수하고 2009년 11월 30일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었다.

 

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주요 활동

  • 2006년 12월 6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는 이완용 등 제1기 친일반민족행위자(1904년 러일 전쟁 ~ 1919년 3·1 운동) 106명을 공개했다. 2006년 12월 7일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에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후 1년 뒤인 2007년 12월 6일에는 민영휘, 송병준 등 제2기 친일반민족행위자(1919년 3·1 운동 ~ 1937년 중일 전쟁) 195명을 공개했다.
  • 2009년 11월 9일에는 반민규명위(위원장 성대경)가 2009년 11월 30일 활동 종료를 앞두고 조만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705명의 명단을 2009년 11월 25일 쯤에 발표하기로 하였다. 발표에는 친일 행적 논란이 일던 박정희 대통령과 장지연 <황성신문> 주필은 제외되었다.
  • 2009년 11월 27일, 반민규명위는 제3기 친일반민족행위자(1937년 중일 전쟁 ~ 1945년 해방) 705인 명단을 발표했다. 발표에는 이전의 보도내용대로 박정희 대통령과 장지연 <황성신문> 주필, 지휘자 안익태도 제외되었으나,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와 방응모 前 <조선일보> 사장, 김활란 前 이화여대 총장 등은 그대로 발표 내용에 포함되었다
  •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설립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행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수록한 친일파는 1006명이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한 인물은 4776명(중복 제외)이다. 일제강점기나 해방 직후의 신문 기사나 문헌들을 읽다 보면 친일파로 충분히 규정되고도 남을 만한데도 진상규명보고서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없는 인물이 허다하다. 진상규명보고서와 <친일인명사전>이 모든 친일파를 전부 다 수록하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이는 우리 사회의 친일파 연구가 아직 미진함을 보여준다. 연구에 대한 지원도 미약하고, 연구를 제약하는 정치적 요인들도 만만치 않다. 설령 연구가 완성된다 해도, 그것이 친일 청산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1006명과 4389명밖에 수록되지 못했지만, 향후 우리 사회의 역량이 증대된다면 일선 시·군청 중간 간부들의 친일도 얼마든지 규명될 수 있다.
  • 그처럼 친일파 조사·연구를 확대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그런 경우에 유의할 것이 있다. 비슷한 지위에 있었으니 친일 수준도 비슷했으리라고 단정하면서 친일의 범위를 무조건 확장시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소위나 중위 같은 친일 군인과 같은 직급의 행정관료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태도는 친일파 규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  친일 반민족행위 보고서에 실린 주요 인물

 

 

 

  • 친일 반민족행위 보고서 :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9년 11월 30일 활동을 종료하면서 4부 25권으로 발간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부터 1945년 해방까지 보다 적극적이고 명백한 행위와 결과가 있는 친일반민족행위 대상자 1,006명에 대한 조사결과 보고서이다.

 

다.  민족문제 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 지난 2009년 11월 8일. 수많은 논란 속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식이 거행되었다. 보수단체의 반발로 인해 계획되었던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발간식을 가질 정도로 마지막까지 순탄치 만은 않았다. 
  •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은 모두 4776명(중복 제외). 관료, 경찰, 예술가, 군인 등 여러 분야에서 친일파들을 분류해냈다. 책에는 이들의 구체적인 반민족적 행위와 해방 이후 주요 행적 등이 담겨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를 이적단체로 규정할 정도로 보수단체의 반대는 격렬했지만,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일념 아래 연구소는 9년에 걸친 노력 끝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마칠 수 있었다. 
  • 반민특위가 와해된 지 60여 년. 후손들의 반민특위가 천신만고 끝에 이뤄낸 쾌거였다. 해방 직후에는 재빨리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하는 기회주의적인 면모도 보여주었다. 
  • 결국, 독립 운동가들이 아닌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한 친일세력들이 애국자로 대접받는 상황이 발생했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은 어느새 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 보수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의 지지기반으로 친일파를 등용한 이후 그 영향을 받은 세력이 이 나라의 압도적인 보수가 되어버린 왜곡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라.  독립 유공자 유족들에 대한 핍박

  • 독립유공자 유족 6,283명 중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를 넘는다. 이들의 후손은 봉급생활자가 10%도 안 되고, 중졸 이하의 학력자 55%를 넘는다. 유공자 후손의 두 집 중 한 집에 중병환자가 있고 직업이 있다는 40% 중 가장 많이 종사하는 직종이 경비원이다. 그 중 일부는 친일파 후손에 밀려 외국으로 피신해 살고 있다.
  • 안중근의사 후손의 경우를 보자. 안중근의사 일가 40여명이 대부분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을 한 가문이다. 부인 김아려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외롭게 살다 사망했으며 광복 후 가족 대부분 김구선생님과 함께 활동하다가 선생님이 암살된 후, 이승만 정권서 탄압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 사촌동생 안경근은 4·19혁명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했다가 박정희 정권 때, 7년간 투옥 당했으며 조카 안진생은 전두환 정권 때 강제 해직, 충격으로 쓰려져 투병하다 사망했다. 손녀 안현생은 친일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사촌 안공근 일가는 북한에서 살고 있다.
  • 신채호선생님의 후손은 어떨까? 신채호선생님의 아들 신수범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살해 위협을 당하자 전국으로 떠돌아다니며 넝마주이 생활을 하다 이승만이 하야 후 가정으로 돌아 왔다. 그의 직계 자손들은 정부에 의해 집안 재산 모두 강탈당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신채호 선생이 일제가 강제 실시한 호적 정리를 거부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인 국적도 부여 받지 못하고 무국적자로 정리했다.

 

마.  친일파(후손)들의 해방 후 득세

  •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근택의 증손자 이상우는 공주대 총장을 역임했다. 그 후손은 2005년까지 친일재산 반환소송을 9건이나 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일제시대 조선최대갑부였던 민영휘의 손자 민병도는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 정미 7적으로 알려진 이병무의 증손자 이진은 국무총리비서실장, 환경부차관, 웅진그룹부회장을 지냈다. 경술국적 민병석의 차남 민복기는 5~6대 대법원장을, 차남 민경택은 서울지법 판사를 역임했다.
  • 해방 대한민국 부통령이요, 동아일보 설립자인 김성수의 손자 김병관은 동아일보 사장을,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회 회원으로 한국사 왜곡과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했던 이병도의 손자 이장무는 서울대 총장을, 또 다른 손자 이건무는 문화재청장을 지냈다. 
  •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기 위해 만든 조선사편수회 회원으로 한국사 왜곡과 식민사관 정립에 기여했던 이병도의 손자 이장무는 서울대 총장을, 또 다른 손자 이건무는 문화재청장을 지냈다.
  •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애국기 헌납 기성회 부회장으로 친일에 적극적이었던 백낙준은 해방 후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 문교부 장관과 참의원의장까지 지냈다. 
  •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협화회'와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에서 일본에 적극적으로 충성한 사람이 이선근이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문교부 장관, 동아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총장, 경희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영남대학교 총장, 동국대학교 총장, 대한교련 회장을 역임하다 죽은 후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다.
  •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항일단체를 토벌하던 방응모는 조선일보 사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만주국장교였던 정일권은 외교부장관과 국무총리, 국회의장까지 지내기도 했다, 친일을 한 대가로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된 나라에서 애국자가 되어 대접받은 이들은 일일이 거명하면 끝이 없다.
  •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현역 소령 안두희는 재판에서 ‘의사’로 추켜세워졌고, 변호인은 피고에게 표창을 주어야 한다고 변론했다. 안두희는 재판에서 “김구 주석의 한독당이 공산당과 같은 노선이다”라고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얼마후 안두희는 풀려나 중령으로 승진했다. 군을 예편해서는 군납업으로 떼돈을 벌어 강원도 양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