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군정 시대의 시작
-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패망함과 동시에 한반도는 해방을 맞게 된다. 곧이어 한반도 내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하여 치안권과 행정권을 담당하여 한반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주적으로 수습하고자 하였다. 이어서 건준은 각 지역 지부로 확장되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박헌영의 공산주의계열이 대거 들어오게 되어 건국준비위원회의 성향은 변질되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 이 무렵,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은 일본 도쿄지역에 GHQ군정 사령부를 설치한다. 1945년 9월에 한반도에는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입성하여 미소 양국은 한반도에 통치안에 대한 포고령을 발표하게 된다. 한반도 이남에 입성한 미군은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였는데, 극동아시아의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의 이름으로 발표하게 된다.
- 이 맥아더 포고령 1호의 제1조 내용을 통해서 미군이 직접 한반도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 이 포고령에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명백히 드러낸다'는 의견과 '포고령의 점령은 occupy의 주둔이란 의미를 오역한 것이다.'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 이어서 국내에서 자주적 치안권 및 행정권을 담당했던 건준을 비롯한 인민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은 부정되었고, 심지어 중국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도 불인정되어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통치활동 및 권한이 부정되었다. 포고령 제2조를 통해 일제강점기시절 때 일본제국에 부역행위를 한 친일 관료, 경찰, 군인 출신 등 반민족인사들이 대거 미군정에 고용되어 편입되었다.
가. 맥아더 포고령 1호 : 미군정의 현상 유지책, 일제 부역자들은 자리를 유지하라
- 해방 후 친일파들을 처벌하자는 열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은 치안유지가 가장 중요했고, 해방된 조선 사람들의 민족감정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 맥아더는 제1호 포고령에서 '정부, 공공단체와 모든 공공사업기관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사람들이라면 미군정을 위해서도 충실히 일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경찰만 보더라도,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일본경찰 출신이었고 나머지 1명도 군수 출신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던 악질 고등경찰이었지만 승진을 거듭해 한국 경찰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 1945년 9월 미국 극동아시아 사령관 맥아더 포고령은 친일파들에게 구원의 등불이었으며, 고문기술자 친일파 노덕술이 서울시 수사과장으로 재등장하기까지 되었다.
- 해방 직후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통치한 미군정청은 한국인의 친일파 청산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정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하면서 일정한 행정 경험과 교육 기회를 가졌던 한국인들을 계속 활용하는 정책을 폈다. 이를 흔히 ‘현상유지정책’이라고 하는데, 미군정의 현상유지정책 덕분에 친일파 청산은 당분간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 여윤형의 인민위원회는 전국적 조직 140여개 구성되었으나, 남한의 미군정은 김구의 임시정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정은 이승만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때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북한처럼 토지를 달라, 친일 청산을 해달라고 주장
나. 모스크바 3국삼상회의 (1945년 12월)
1)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 12)
-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미·영·중·소에 의한 최고 5년간의 한반도 신탁 통치 등을 결정하였다.
2)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발표내용
- 1945년 12월 16~25일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戰後)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 회의이다.
-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4개국 대표에 의한 신탁통치를 기본 취지로 하는 미국측의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 취지로 하는 소련 측의 수정안이 토론되었다. 회의 결과 12월 28일 영국의 동의로 협정이 체결되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발표되었다.
첫째,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설하며,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고, 일본 통치의 잔해를 빨리 청산할 조건들을 조성할 목적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aprovisional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한다.
둘째, 연합국이 한국 임시 정부의 수립을 원조·협력할 방안의 작성은 민주주의적 정당·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미소 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셋째,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대 강국에 의한 신탁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4개국이 심의한 후 제출한다. - 이 협정 내용에 대해 충칭[重慶] 임시 정부의 추대를 주장하던 한국 독립당·한국 민주당 등의 우익 세력은 임시 정부수립을 위한 국제적 원조 방안으로 선전하면서 신탁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반면에 여운형의 조선 인민당,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 등은 3상 회의의 결의를 한국의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적 합의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좌우익의 대립에 미국·소련의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통한 통일 임시 정부의 수립이라는 3상 회의의 결정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다. 동아일보의 가짜 뉴스 → 신탁 통치의 갈등 촉발
-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한국의 신문사들이 일으킨 최악의 초대형 오보 사건이다. 한반도를 식민지(외지)로 삼았던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등장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미국이 주장했고 소련이 반대했던 것을, 정반대로 소련이 주장하고 미국이 반대한다고 오보한 것이다.
- 미국의 입장은 해방 후 1948년 까지 미군정을 하고, 미국은 소련, 좌익공산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찬탁을 채택하려 했으나, 동아일보가 1945년 12월 27일 삼상회의 발표 이전에 동아일보는 소련은 찬탁, 미국은 반탁(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고 가짜뉴스 보도함으로 이 사건은 해방 이후 본격적인 좌우 대립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때문에 누군가 배후에서 고의적으로 오보를 계획했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도 퍼져 있다.
- 이승만 한민당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게 되었고, 국민들의 반탁운동을 유도, 여운영계 중도세력이 집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하였음
- 미군정이 1946년 7월 서울지역 1만 여명에게 여론조사실시. 결과는 77%의 사회주의를 지지. 좌우대립구도를 심기 위해 ‘분할하여 통치하라’라는 미국의 정책
- 남한 만의 단독선거로 분단을 획책하려는 미국의 분할통치전략에 맞서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군정과 이승만은 국민들의 통일 염원을 왜곡해 좌우대결로 조작하는 데에 사활을 걸었다. 제주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여수 시내가 불바다가 되어야 했던 배경이었다
- 친일파와 일제 부역자의 반탁 운동 적극 가담하였고, 친일파와 지주, 자치 청원세력들이 한민당으로 모여 반탁 운동 주도, 반탁대변신문 동아일보 김성수가 핵심이었다.
- 좌익 계열은 신탁통치 지지(제2의 매국노 프레임). 신중중립론자(빨갱이 프레임)
2. 이승만의 친일청산을 위한 법 제정 및 반민특위 구성
가. 반민족 행위 처벌 특별법 제정
- 3년간의 미군정이 끝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계기로 그동안 미루어졌던 친일파 청산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 우선 제헌헌법 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새롭게 탄생할 대한민국 정부가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 반민 특위는 반민족 행위자를 선정하고 주요 인물들을 검거하였으나, 반공 우선 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이승만은 이들의 활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반민 특위의 활동은 유명무실화되었고, 친일 잔재 청산의 과제 해결은 좌절되고 말았음
- 이후 제헌 국회의 반민족 행위 처벌법 공포(1948. 9.), 1948년 10월 12일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 특위)와 특별 재판부 구성하여, 주요 친일파 조사, 체포(박흥식, 노덕술,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하였지만, 이승만은 반민족행위자 체포는 치안의 혼란과 공산당을 돕는 일이라 하여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였다.
- 해방 후 반민특위를 구성해 일제 반민족 행위자 7,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이중 실제사건으로 682건을 취급 이 중 559건을 특별검찰부로 송치했는데 이 중 기소건수는 221건에 불과했으며, 실제 구형(재판종결)은 38건뿐이었습니다. 실제 구형이 됐던 38건도 이승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으로 모두 무죄 또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결국, 대한민국에서 친일파로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 정부와 경찰 요직에 자리잡은 친일파의 방해, 국회 프락치 사건 → 친일 경찰의 반민 특위 습격(6•6 사건) → 반민법 시효 만료(1949. 8.)로 반민 특위가 해체되었다
- 결국, 이승만 정부의 방해 공작으로 반민법의 공소시효는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말일로 단축됨에 따라 친일청산은 실패에 그쳤다. 그 이후 박정희 정부 때에는 일본에 자본을 차관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친일파 숙청에 대한 논의 자체가 어려워졌다..
나. 반민특위 해체를 위한 친일파의 반격 : 이승만, 반민특위 활동 반대
- "지금 국회에서 이 문제로 많은 사람이 선동되고 있으니 지금은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離散)시킬 때가 아니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에 관한 정부의 입장, 1948.9.3 - 1948.9.22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 "정권이양 시기이므로 현직에 있는 사람을 처단하는 것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반민처단법 때문에 경찰관들이 동요한다는데 정권이양이 다 되고 정돈되거든 처단하자."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에 관한 기자회견, 1948.10.1
- 1949.1.8 본격적인 친일파 조사, 체포 시작
- 1949.1.14 반민특위, 국회와 정부 내 친일경력자 청산 제기
- 1949.1.13~31 친일경찰 노덕술, 최연, 김태석, 노기주, 이원보, 서용출, 남학봉 등 체포
- "특별조사위원회의 행동이 지나친 바 있어 국가치안에 방해가 된다. 근자에 진행되는 것을 보면 특별조사위원 2·3인이 경찰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을 잡아다가 구금·고문한다는 말이 들리게 되니.. 대통령령으로 검찰청과 내무부 장관에게 지휘 하에 특경대를 없이하고 특별조사위원들이 체포·구금하는 것을 막아서 혼란상태를 정돈케 하라고 한 것이다."
1949.2.15 반민특위 특경대 폐지와 체포권한을 제한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방향에 대해 담화, - "경찰 기술자 중에 그들의 기술을 상당히 이용해서 모든 지하공작과 반란음모 예방해야 하는데, 조사위원들은 이것이 꿈에도 생각이 없으니..." 1949.2.21 '치안보장과 반민법에 대하여'라는 반민특위 활동 비판 담화
다. 반공투사, "반민법은 망민법(網民法)" 비판
- 일제 때 만주에서 일본 경찰의 촉탁으로 독립운동가를 검거하는 데 앞장섰던 밀정 이종형은 해방 직후 '대동신문'을 운영하면서 친일ㆍ민족반역자 처단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 반민법 공포 다음 날, 그는 한국반공단(단장:이종형) 주최로 '반공구국총궐기 정권이양 대축하 국민대회'를 열어 "국회에서 통과한 반민법은 일제강점기 반장이나 동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온 국민을 친일의 그물로 옭아매는 망민법(網民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민족분열의 법을 만든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공산당 프락치"라고 주장했다.
- 그는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일제 밀정 노릇을 "만주에 가서 공산당 때려 부수고 민족 운동의 체계를 세워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애국자'라고 억지를 부렸다.
라. 친일경찰, 반민특위 관계자 암살음모사건
- 친일파들의 반민특위활동 방해는 데모를 통해 친일 청산을 비난하거나, 반민법 개정을 요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반민특위 위원에 대한 암살 시도로까지 이어졌다.
- 악질 친일 경찰인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전 수사과장 노덕술 등이 모의하여 테러리스트 백민태에게 많은 돈을 주고 반민특위 국회의원들을 암살하게 한 후, 이들을 공산당의 프락치로 조작해서 38선 부근에서 북한으로 넘어가려다 사살당한 것처럼 꾸미려 했다.
- 그 대상자들은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노일환, 김웅진, 김장렬 의원이었다.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불안해진 백민태가 검찰에 자수하면서 암살 모의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3. 반민특위 해체를 위한 결정적인 사건
가. 반민특위 습격
- 반민특위를 해체시킬 음모의 결정타는 반민특위 습격사건이었다.
-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은 반민특위를 위협하는 대중시위를 조직하던 것이 드러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 그러자 1949년 6월 6일 한밤중에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와 이승만 대통령의 묵인으로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40명의 무장경찰들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하여 특위위원과 산하 특경대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체포ㆍ고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각 지방의 특위본부에도 테러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친일경찰에 대한) 체포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 자신이 직접 특경대 해산을 명령한 것'이라며 반민특위 습격자들을 보호해 주었다. 이 사건 이후 반민특위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나. 국회 프락치 사건
- 반민특위 활동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의회가 줄다리기를 하던 중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국회의원 15명이 구속되었다. 그중 5명은 반민특위에 열성적으로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 친일청산에 앞장섰던 의원들을 '좌익 빨갱이'로 몰아 사실상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이승만을 견제할 힘을 잃었고, 민족정기를 세울 정치세력이 사라져 더욱 보수반공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 김구의 암살
- 반민특위 습격 후 20일 만인 1949년 6월 26일, 분단극복과 친일 청산의 버팀목이던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암살범은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로 그 배후에는 친일파들이 있었다.
- 반민특위 습격에 이은 김구 선생의 죽음은 통일자주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희망과 친일청산을 꿈꿨던 그의 신념이 이 땅에서 좌절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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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1층에 빈소가 차려지고 장례가 치러지는 열흘 동안 조문객을 받았다. 오른쪽에 아들 내외를 비롯한 상주, 왼쪽에 조완구와 엄항섭을 비롯한 측근 인물들이 도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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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종로에 접어들고 있다. 장엄한 행렬과 구름같이 모여든 추모객들의 규모가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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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추모객이 효창원 안팍을 가득 메웠다. 안두희가 쏜 총알 자국이 선명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경교장 앞뜰의 시민들. 어린 학생에서 노인까지 다양한 모습이 슬프고도 어수선한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사건직후 〈라이프 Life〉지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 Carl Mydans가 찍은 이 사진은 1949년 7월호에 "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라. 반민특위 와해
-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국회프락치사건'의 발생, 김구 선생의 죽음 등을 통해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반민특위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 1949년 7월 1일 곽상훈 의원 등 21명은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8월로 끝내는 법 개정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7월 7일 특위 조사위원은 전원 사표를 제출했다.
- 새로운 위원장에는 반민법 제정에 반대했던 이인 전 법무장관이 선출되었고, 조사위원 10명 중 6명이 바뀌었다.
- 그래서 지지부진하게 활동하던 반민특위는 1949년 10월 4일 반민특위 폐지 법률이 공포됨으로써 완전히 해체되었다.
마. 좌절된 친일청산의 꿈
-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1년도 안된 1949년 8월 31일 공식적으로 활동을 끝내기까지 반민특위가 취급한 사건은 모두 682건이었다. 이것은 전체 조사 대상 7천여 건 가운데 10%도 되지 않았다.
- 408건의 영장이 발부되었으나 그중 221건만이 기소되었다. 재판이 종결된 것은 불과 38건으로, 체형 12건(무기징역 1건, 사형 1건 포함), 공민권 정지 18건, 무죄 6건, 형 면제 2건이라는 초라한 결말이었다.
- 체형을 받은 12인 또한 보석이나 형집행정지로 1950년 6ㆍ25전쟁 전에 모두 풀려났다.
출 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 친일 청산, 절호의 시기를 놓친 대한민국
→ 이승만 대통령, 친일파와 손잡다
- 해방 직후 다른 정치가들이 친일파 청산을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은 반면, 이승만은 정부수립 이후로 미루자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좌ㆍ우파를 가리지 않고 국내 정치세력이 모두 대표로 꼽을 만큼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오랜 해외생활로 임시정부 대표 김구나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에 비해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다. 결국 이승만은 부족한 국내 기반을 메우기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았다.
- 이승만은 '친일파 문제를 먼저 제기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하는 것이고 정부를 수립한 후 조치하는 것이 순서'라며 일단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무조건 뭉쳐야 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 친일파처단은 절호의 시기였던 해방정국과 정부수립 직후 민중의 열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를 적극 옹호하고 육성한 미국의 대한정책, 정치세력의 정략적 이용, 이승만정권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일파처단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한국현대사에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정부수립 후 친일파는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반공이데올로기로 은폐시키고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 충성을 다하며 독재정권의 영속을 추구했으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 또한 친일파가 단죄를 받기는커녕 권력의 요직을 장악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제 분야에서 지도층임을 자처하며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엄청난 의식의 혼란을 초래케 했다. 해방 후 단죄되었어야 할 친일파가 오히려 사회 전 분야를 주름잡으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사회, 자신은 물론 가족의 희생까지 기꺼이 감수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이 탄압받고 소외되어 온 사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 사회, 이것이 정녕 제대로 된 사회인가?
출 처 : 왜 지금 ‘친일청산’을 주장하는가? 허 종(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곰곰이 유튜브 친일의 역사
'4. 이념의 갈등, 진영 논리로 양극화된 대한민국 > 4-1.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이승만 초대정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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