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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政治)를 정리(整理)해 드립니다
4. 이념의 갈등, 진영 논리로 양극화된 대한민국/4-1.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이승만 초대정권

4-1-4. 이승만 정권의 공과 과 (부정 평가)

by organizer53 2024. 2. 22.

1. 부정적 평가 

가. 친일파 등용

  •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노덕술,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고 한다. 이승만도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 역사학자 한영우는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나. 각종 민간인 피해의 책임

  • 비판론자들은 제주4.3사건, 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발생된 대규모 민간인 피해에 대해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을 제기한다. 또한 6.25 전쟁 시기 한강 인도교 폭파, 보도연맹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등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을 제기한다.
  • 1960년 4.19 혁명에서는 어린 초등학생들만으로 구성된 열도 여러 개 만들어져서 시위대 언니 오빠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며 시가 행진을 하는 행렬에 동참하여 행진을 하였고, 그런 초등학생들에게도 시위 진압 경찰들이 발포를 하여서 다수의 초등학생들도 이승만의 관사 경무대 앞에서 사망하였다.

 

다. 국가 보안법 남용

  •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국가 보안법이 제정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그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했다는 사실이다. 
  • 1949년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했을 때, 국가보안법 제정에 극렬 반대했던 노일환 의원 등 반대파 소장의원 13명을 이 국가 보안법을 통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했으며, 1949년 한 해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가둔 사람의 숫자가 12만 명이 넘었다.


라.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

  • 1954년 제2차 개헌의 의도가 국익보다는 이승만과 자유당의 사리사욕에 있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개헌안의 표결 결과에 대한 국회의장 또는 사회자의 의사 표시가 취소 또는 번복되려면 먼저 타당한 법적 근거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또 그 근거에 따라 절차대로 진행돼야 하는데, 자유당은 그런 근거와 절차가 없었던 당시 법의 허점을 이용해 즉석에서 표결을 번복하였다(의결정족수 135.33석을 135석으로 사사오입 적용). 이에 따라 제2차 개헌은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마. 언론탄압

  • 1955년 '동아일보 괴뢰 오식 사건'과 '대구매일신문 피습 사건', 1958년 '경무대 똥통 사건'과 '함석헌 필화사건',[506]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켜 언론을 탄압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는다.

 

바. 부정선거의 책임

  • 1958년 1월 1일, 자유당과 민주당은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협상선거법의 언론 규제 조항은 위헌 시비가 있었으나 민주당이 이를 묵인함으로써 통과되었다. 협상선거법의 언론 규제 조항 삽입은 자유당이 본격적으로 부정선거를 기획할 수 있도록 기초를 제공했으며, 언론과 국민의 기본권이 규제를 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 자유당과 민주당은 협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의도한 대로 압도적 의석을 차지했고, 무소속과 군소정당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이후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으며 이에 대해 대통령인 이승만의 도의적 책임이 있고 실제로 하야하였다.


출 처 :  위키 백과

 

 

2. 외교력 평가

가. 대미국 관계

  • 이승만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이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 미국은 비밀리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파견한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과 일본 총리 가쓰라가 비밀 회담으로 일본이 한국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을 일본이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 1940년대에도 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고,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나. 대일본 관계

  •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
  • 19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다. 대아시아 관계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한 중화민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장제스를 방문하여 면담하기도 하였고, 내한한 장제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응오딘지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 그러나 인도의 네루와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출 처 : 위키백과

 

 

3. 이승만 정권의 의의와 한계  

  • 대한민국의 기반은 이승만 정부가 다져놓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세력들은 제1공화국 하의 이승만 정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박정희를 비롯한 5.16 군사정변 주동자들은 소위 '혁명재판'을 통해 이승만 정부 실세 상당수를 처벌했다. 하다못해 현재 존재하는 모든 정당 중에서 이승만의 자유당을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정당은 없으며 간혹 당명에 자유가 들어가면 약칭이 자유당이 아닌 것으로 정할 정도다.
  • 결론은 보수정당, 민주당계 정당, 진보정당 모두 이승만 정부, 자유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이명박정부부터 뉴라이트 계열의 유입으로 이승만 정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이 생겼다. 윤석열 정부는 이승만 기념관을 설치하려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격세지감이라 할 수 있다.
  • 더불어 역대 정권 중 가장 많은 대한민국 국적의 사망자가 발생한 공화국이기도 했다. 조선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부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 기타 양민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 같은 건들은 이승만의 책임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외에도 제주 4.3 사건 같은 것도 들 수 있고, 제주도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식량난 문제도 후대 정권에 비해서 심각했다.
  • 2차 대전 전후의 여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신생독립 후진국처럼 독립운동가 지도자들이 집권한 후 독재화되면서 몰락한 정치실패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출 처 : 나무위키

 

4. 이승만 정권의 논란과 의혹

가. 단독정부 수립 정당성 논란

  •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이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나. 독재자 여부 논란

  • 허정에 의하면 '우리가 독재라고 부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설프고, 불철저했던가.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이렇게 불철저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독재자는 우남과는 다른 유형임을 이제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의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지만 그가 평소에 쌓은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 독재를 했기에 독재자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 윤치영은 이승만이 평소 '부정과 부패를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공명선거를 믿고 있었다며 이승만 몰래 자유당 측근들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보고되자 깜짝 놀라, 그렇다면 학생과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며 자진해서 하야한 이박사였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이승만은 4월 27일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었다.'라며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원순은 '학생들의 4.19 의거가 한창일 때 그는 대통령 직위를 미련 없이 버렸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별로 명예욕이 강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이도 생각된다.'라고 주장했다.
  • 최기일은 이승만이 말년에 잘못된 측근들이 눈과 귀를 가려서 오도했다고 보았다. 최기일은 박정희를 한국 최초의 성공한 쿠테타이자, 한국 최초의 독재자로 보았다.

다. 측근들의 부패와 오도설

  • 측근들이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설도 있다. 이승만이 돈암장, 이화장에 있을 때부터 비서관이며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은 이기붕의 수하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이박사를 속였다고 진술했다. 윤치영은 '가슴아픈 것은 면종복배판 측근들에 대한 이박사의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측근을 잘 못 기용했다면, 그 책임 역시 임면권자인 대통령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 윤치영은 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라고 주장했다.
  • 윤치영은 내무장관 최인규와 자유당 간부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선거전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내무장관 최인규가 진두지휘하는 행정부의 부정선거 음모는 자유당 수뇌들과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정관서와 경찰이 청중을 강제동원하는 전국 유세가 2월 27일 대구에 이르러 수성천변에는 역사상 초유의 군중이 자유당 집계로도 30만에 달하였다.'며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에는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등교케 했다. '최인규가 각급 행정관서와 경찰, 그리고 지방선거관리위원회에 내린 비밀지령은 이기붕 후보를 필사적으로 당선시키려고 무리를 담고 있었다'며 윤치영은 '이러한 부정선거운동의 양상을 보며 더군다나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평소의 소신과 철학대로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으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이승만 박사의 처지가 가엾고 통분할 노릇이었다.'고 했다. 윤치영은 노쇠한 이승만 대통령의 여생을 점치던 정상배와 협잡꾼들과 같은 기회주의자마저 끼어들어 벌써부터 논공행상에 여념이 없는 작태들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허정 역시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에 희생되었다 고 하였다.
  • 장면은 이승만 측근들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장기집권은 이승만의 뜻이 아니라 그 부하들의 농간이었다는 것이다. '그 분을 장기집권 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중석불 사건, 원면 사건, 연계 자금 사건, 산업 금융 채권 사건 등 추잡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 한편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을 은연중에 인식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1958년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당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철창에 갇힌 호랑이'에 비유해서 혼잣말처럼 독백하시던 일로 미루어 나로서는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며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부하들의 농간에 놀아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라. 진보당 사건 논란

  • 정적 조봉암을 숙청하기 위해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사법살인을 일으켰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2020년 러시아 연방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구소련 외교문서가 발견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 이 문서에 따르면, 조봉암은 북한과 내통하던  간첩이며, 진보당은 소련 내지는 북한의 지시를 받는 소위 괴뢰정당이며, 김일성은 조봉암의 대선 출마에 관여했으며, 북한은 조봉암에게 대선자금을 지원했다. 이 구소련 외교문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2011년 대법원의 재심 무죄 판결도 다시 들여다 봐야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