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정치(政治)를 정리(整理)해 드립니다
4. 이념의 갈등, 진영 논리로 양극화된 대한민국/4-4. 15년 민주 진보개혁정권의 개혁 실패

4-4-4. 민주 진보개혁 정권의 개혁성과 부진 ( 김대중, 노무현 정권)

by organizer53 2024. 1. 7.

 

1.  김대중 국민의정부의  功과 過

가.  김대중 정부의 긍정평가

  • 김대중 정부는 IMF 외환 위기 극복과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을 천명하였다. 
  •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본격화하였으며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였고,  IT 및 벤처기업육성,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에 노력하였다
  • 나아가, 전자정부 구축과 세계 최초 전자정부법 입법, 인사청문회 제도 도입,  수출주도형 경제부활 통해 경제를 재도약시키면서 기초생활수급제도 도입, 사회보험제도의 완성 등 획기적인 복지 안전망 구축통한 민생경제 구현하였고
  • 적대적인 군사적 대결 구도가 지속되어온 남북관계를 신뢰, 화해, 협력, 교류에 바탕을 둔 햇볕정책으로 역사적인 2000년 6.15남북 정상회담과 공동선언,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상봉, 남북도로 철도연결, 개성공단 추진 등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어,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 2001년 김대중 정부의 강한의지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완전 독립기관으로 설립되었다

 

김대중 정권의 화해와 용서

  • 1999년 5월 영남지역을 방문해 지역 원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관계자들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기념사업에 대해 정부 차원의 지원 의사를 밝혔다. 김대중은 당시 만찬에서 "물러난 대통령은 모두 부정적인 평가만 받아 왔지만 공적은 평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6.25의 폐허 속에서 우리나라가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 가져다 주었다. 근대화를 이룩한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라고말함
  •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무엇보다 자신을 핍박하고 민주화를 거부해 그야말로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설정했던 박정희에 대한 입장을 바꿔 영-호남 화해를 모색하려 했다
  • 야당시절, 자신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엮어 사형선고를 내린 전두환 전 대통령과 12.12 군사반란과 관련해 수감 중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1997년 사면 결정을 내렸다. 이 점에 대해서 당시 시민단체나 민주화운동 단체에게 엄청난 비판도 받았지만, 역시 큰 피해를 입은 김 전 대통령이 이러한 단체들을 설득하면서까지 용서하려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점도 있다. 또한 생존 중인 전직 대통령들(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열고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등 개인적인 화해는 물론, 이들 전직 대통령 지지자들의 마음까지 얻고자 노력하였다.

 

나.  김대중 정부의  부정평가

 

  • 임기 중에 발생한 최규선 게이트 사건, 진승현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사건, 이용호 게이트 등 각종비리 사건이 터져 비리공화국이라 일컬어졌으며, 
  •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시 노태우 대통령으로 부터 불법정치자금 수수(일명 20억 + a 사건)의혹이 터졌다
  • 2003년 특검을 통해 현대가 4억 5,000만 달러를 국가정보원 계좌를 통해 북에 지원했으며 이 중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금 1억 달러가 포함돼 있다는 불법대북송금사건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그 외에도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이 수감되었다
  • 슬하의 아들 셋이 모두 권력형 비리에 얽히는 오점을 남겨 장남인 김홍일씨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인사청탁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006년 의원식을 상실했으며 차남인 김홍업씨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현대와 삼성으로부터 약 25억 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고 삼남인 김홍걸씨도 스포츠토토 사업자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특히 기업의 비정규직 및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과 긴축정책, 신용카드 정책, 부동산 정책, 대북정책, IT 벤처기업 육성 정책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노무현 참여정부의  功과 過

가.  노무현 정부의 긍정평가

  • 능력을 우선시하는 인사 기용 성향을 가져 이용섭 국세청장, 고건 총리, 이해찬 총리, 반기문 외교부 장관을 기용하였다
  •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해당 위원회에선 6.25전쟁 당시의 양민학살이나 전시 민간인 희생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각종 간첩조작 사건 등 그간 금기시됐던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용공조작 사건들을 조사, 정리하여 피해자들을 복권시키고 가능한 경우 뒤늦게나마 보상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 노무현은 취임 3년차인 2005년 8월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을 추서했다. 지난 3·1절 여운형 등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 서훈에 이어 주요한 사회주의 활동가에 대해 서훈 추서되었다.
  • 모든 대통령 기록물은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로 특별 관리되어 회의 중 남긴 쪽지 하나까지도 대통령 기록관에 보관되도록 되었다.
  • 질병관리본부는 2004년 설립이 진행되었고, 관련 법제정을 통하여 감염병관리 부서를 통폐합을 통하여 인력이 확대된다.
  • 참여정부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300인 이상 기업부터 주 5일제를 2004년 7월부터 확대 시행해 개인의 삶의 질 확대와 경제적 효과에 기여하였다.
  • 한미 FTA 추진 중에 노무현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이후 한미 FTA가 체결된 후 이전에 있던 우려와 달리 오히려 대미 무역 흑자가 늘어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리들은 불평등하게 협정을 맺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물론 최종적으로 체결한 것은 이명박 정부 이지만 여러 협정 내용을 만들고 추진한 것은 참여정부 이므로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권력기관 개혁

 

국정원, ‘탈정치·탈권력화’ 민주 정보기관으로 탈바꿈 

 

 

검찰, 정치적 중립성 확립 및 권위주의 문화 청산 

 

경찰, 국민 위한 봉사경찰·인권경찰로 거듭나

 

강도 높은 개혁, 국세청이 투명해지다

 

 

나.  노무현 정부의 부정 평가

노무현 대통령, 날개꺾인 '도덕성'

 

노무현 정권의 정경유착, 박연차 게이트

 

4대 개혁입법 파행 및 부동산 대책 실패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와 촛불시위 (2004년)

  • 2004년 2월 24일 전국에 생중계된 방송기자클럽 초청 대통령기자 회견 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앞으로 4년 제대로 하게 해 줄 것인지 못 견뎌서 내려오게 할 것인지 국민이 분명하게 해줄 것”이라며,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 또 “대통령이 뭘 잘 해서 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고 발언

 

  • 2004년 3월 PC 메신저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검정 리본을 단 누리꾼의 행렬이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었다. 즉각 10만 가까운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다. 분노한 촛불은 꾸준히 타올랐고, 동시에 두 달여 탄핵 심판이 이어졌으며  
  • 그해 4월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한나라당 등 탄핵을 추진한 정당을 표로 심판했고, 5월 14일 결국 헌법재판소는 기각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