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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Y 시사 특강/10-2. 10분 시사 특강

근 ·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 (근대 자본주의 → 신 자유주의)

by organizer53 2023. 12. 5.

1.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  공급과잉에서 시작되었다

  • 자본주의는 산업혁명에 의해 시작되었다. 산업혁명은 단적으로 공장의 탄생을 말한다. 공장은 기계와 분업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물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쏟아져 나온 막대한 양의 생산물이 화폐경제를 만나면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가 탄생했다. 
  • 공장의 특징은 대량생산이고, 이에 따른 자본주의의 특징은 공급과잉이다. 공장이라는 생산수단이 탄생하기전인 중세에는 물건을 사려면 제작자에게 필요한 물품을 미리 주문했다가 완성된 이후에 받을 수 있었다. 수요가 있는 만큼 공급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공장은 주문이 있기 전에 미리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해낸다. 물품이 필요한 사람은 기다릴 필요 없이 시장에 가서 이미 생산된 물품을 구입하면 된다. 이러한 특성, 즉 물품을 구입하려는 욕구보다 이미 생산된 물품이 더 많은 상태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2.  자본주의의 특성  공급과잉 (공급 > 수요)

 

  • 자본주의의 특성은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상태다. 다른 말로는 공급과잉, 초과공급이라고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공급과잉의 상태에 놓인다. 공급과잉의 상태는 무엇인가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가장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상태다.
  • 당신이 공장이나 기업의 소유주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 인가?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상태가 문제이므로, 해결 방안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밖에 없겠다. 하나는 공급을 줄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수요를 늘리는 방법이다. 각각의 현실성을 검토해보자. 우선 공급을 줄이는 방법부터 생각해보자. 공급을 줄인다는 것은 공장 가동을 멈추는 것이다. 이건 앞에서 말했듯 좋은 방법이 아니다. 공장을 멈춘다는 것은 고정비용의 부담을 전제하는데, 고정비용만 계속 지불하느니 차라리 공장을 가동하는 게 더 이익이다.
  • 이제 해결 방안은 하나뿐이다. 수요를 늘리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수요를 늘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역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서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두의 가격을 낮춰 소비를 유도하는 것이다. 이 밖에 특별히 다른 방안은 없을 듯하다. 물론 신제품 개발이나 광고비용 확대, 사업 효율성 개선 등의 부수적인 방법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은 본질적인 해결 방안이 아니다. 수요를 확대할 수 있는 '시장 개척'과 '가격 인하'라는 두 가지 해결 방안이 그나마 가장 궁극적인 방안이다.
  • 산업화, 즉 공장의 탄생으로 공급과잉을 맞이하게 된 인류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가지 방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두 방안이 근대와 현대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  공급과잉 해결 방안

      ① 시장 개척

      ② 가격 인하

 

3.  제국주의 시대  그들에게는 식민지가 필요했다

  • 산업화를 통해 자본주의가 된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특성인 공급과잉 문제에 필연적으로 봉착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수요를 늘리기 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만 했다. 시장을 개척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다. 식민지를 만들어 원료를 공급받고 가공품을 판매하면 된다. 이것이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된 유럽이 필연적으로 거칠 역사의 방향이었다.
  • 실제로 산업화된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세계로 뻗어나갔다. 영국은 인도로 갔고, 스페인은 남미로 갔으며, 프랑스는 아프리카로 갔다. 그곳에 식민지를 만들어, 자국에서 만든 생산물을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판매하고 큰 이익을 얻었다.
  • 대표적인 예가 영국이다. 영국은 18세기부터 인도를 식민지화한 후에 자국의 면직물을 인도에 판매하고 그 대가로 아편을 받았다. 그리고 받은 아편을 다시 중국에 판매하고 그 대가로 홍차와 막대한 부를 얻었다. 반대로 인도 경제는 영국의 면직물산업에 종속되면서, 많은 자원과 부를 영국에 빼앗겼다. 면직물로 인해 국가 전체가 영국에 종속된 것이다. 그래서 인도의 민족 해방을 이끌었던 간디는 영국산 면직물의 수입을 막기 위해 스스로 옷을 제작해서 입자는 운동을 펼쳤다. 우리가 간디를 생각할 때 물레를 감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레는 영국산 면직물에 대한 거부이자, 궁극적으로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상징했다.
  • 근대 유럽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확보함으로써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산업화된 국가들이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던 시대를 제국주의시대라고 한다.
  •  이 시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국가가 하나 있다. 바로 독일이다. 독일은 빠르게 산업화하는 유럽에 속했으면서도 산업화가 늦어지면서 뒤늦게야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독일의 산업화가 늦어진 것은 중세 봉건체제가 오래 지속되면서 계속된 내전으로 산업화를 추진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통일된 독일은 산업화를 먼저 거친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들과는 다르게, 면직물 같은 전통적 공업보다 국가주도의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며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 독일 역시 산업화에 따라 자본주의가 정착했고, 자본주의의 특성인 공급과잉 문제에 봉착했다. 다른 산업화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장을 확보해야만 했다. 즉, 식민지 국가를 건설해야만 했다. 독일은 필연적으로 식민지를 찾아 떠났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더 이상 차지할 만한 식민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앞서 산업화를 이룩한 열강들이 식민지를 모두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는 위기였다. 산업화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이 필수지만, 새롭게 개척할 수 있는 시장이 없으니 말이다.
  •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 가운데, 기회가 찾아왔다. 1914년,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지역에 갔다가, 독립을 원하는 세르비아계 청년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보스니아가 세르비아에서 뭐가 어쩌고 어쨌다는 거냐며 낯선 용어들에 당황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부적인 내용은 이 책에서 다루려는 방향이 아니니, 큰 줄기만 파악해보자.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러시아 지 역에서 민족 문제로 암살당한 것이다. 독일한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4.  제1차 세계대전  공급과잉이 전쟁을 일으켰다

  •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약 4년 동안 지속되었다. 표면적인 원인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리자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참가했다. 이후 미국이 참전하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제국주의 확장을 위해 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쟁의 무대는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 그렇다면 독일은 왜 전쟁을 원했을까? 뒤늦은 산업화로 식민지 경쟁에서 제외되어 있어서였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산업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급과잉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공급과잉의 문제는 식민지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국가들이 식민지를 모두 차지해서 식민지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힘으로 빼앗아 오면 된다. 다만 전쟁을 위한 명분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때마침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이 명분이 된 것뿐이다. 황태자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도 독일은 어떻게 해서든 구실을 만들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일인의 천성이 나쁘거나 악독하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본주의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공급과잉이라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 이를 극복하고 산업화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이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은 전쟁밖에 없었다.
  • 산업화 → 자본주의 → 공급과잉 → 식민지 필요 →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 전쟁
  •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이탈리아가 3국 동맹을 형성했고, 영국과 프랑스와 러시아가 3국 협상을 결성하여 대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협력한 이유는 단순했다. 국가주도의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독일이 자신들의 식민지를 위협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독일을 저지해야만 했다.

       3국 동맹 :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3국 협상 : 영국, 프랑스, 러시아

 

  • 치열한 전투 끝에 전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19년 6월 28일,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승전국들은 전쟁의 책임을 물어 전쟁범죄국인 독일과 조약을 맺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알려진 이 협약으로 독일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10%가 넘는 영토를 연합국에 반납해야 했으며, 군대 보유를 엄격하게 제한받게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의 경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침체하고 말았다. 반면 세계는 전쟁 이후 빠르게 안정되고 성장해갔다.
  • 이렇게 해서 공급과잉이라는 자본주의의 특성이 초래한 국가 간의 갈등은 해소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하다. 세계가 역사상 유례없는 끔찍한 대규모 전쟁을 치렀는데, 어떻게 그토록 빠르게 안정되고 더 나아가 경제적 성장까지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 실제로 다수의 민간인은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전쟁은 일부 부르주아 혹은 일부 국가들에 막대한 부를 창출해준다. 자본주의는 전쟁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전쟁은 자본주의 국가들을 유혹한다.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유지해주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유행이다. 전쟁과 유행은 자본주의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공급과잉의 문제를 단번에 해소하듯, 유행은 필요를 뛰어넘는 막대한 소비를 창출해서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한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옷과 핸드백들이 매년 옷장 구석에 쌓여가거나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전쟁과 유행이 없이 자본주의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5.  세계 경제대공황  가격 경쟁은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 앞서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공급이 수요보다 많다는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급량을 줄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님도 전제했다. 수요를 늘려야만 했다.
  •  수요를 늘리는 방법은 두가지였다.

     첫째, 시장을 개최하는 것이고,

    둘째, 상품의 가격을 낮추는 것이다.

 

  • 이 중에 우리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방법이 역사를 제국주의로 이끌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데 더 이상의 시장 개척은 불가능해 보인다. 새로운 식민지는 지구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다. 이제 수요를 늘리기 위해 남은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할 차례가 왔다. 가격을 낮추는 방법이다.
  • 공급과잉의 문제는 사회 전체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고, 모든 산업에서 가격을 낮추기 위한 노동자 해고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노동자는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라는 점이었다. 해고당한 노동자는 소비 능력을 상실한 소비자와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적으로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소비도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요량보다 공급량이 더 많아짐을 의미하고, 공급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시 모든 산업에서 가격 인하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또 가격을 인하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해고해야만 하고, 해고된 노동자가 다시 소비 능력을 상실한 소비자가 되어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 사회는 경기침체의 하수구 속으로 회전하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는 늘어갔고, 문을 닫는 공장과 기업이 속출했다. 이 문제가 폭발한 사건이 있었다. 뉴욕 증시가 대폭락하면서 세계경제 전체를 무너뜨린 1929년의 세계 경제 대공황이다.

 

 

 

  • 전쟁으로 수요가 폭발하면서 이루어진 경제 성장은 특히 미국의 유례없는 호황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에 낙관했다. 빠르게 늘어나는 자산에 들떠 있었고, 많은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기업의 주식을 사기 위해 빚을 내어 투자했다. 하지만 1929년 10월 29일, 뉴욕 증시는 하루아침에 30% 폭락했다. 그리고 폭락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져 1932년에는 90% 가까이 폭락했다. 국내 총생산은 반 토막이 났고, 실업률은 25%에 달했다. 당시 세계총생산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하던 미국 시장의 침체는 빠르게 세계 시장의 침체로 이어졌다.
  • 대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 각국은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우리는 대표적인 세 국가의 극복 방안을 살펴보려 한다. 그것은 미 국, 러시아, 독일이다.
  • 우선 미국부터 알아보자. 미국은 뉴딜정책을 시행했다. 이것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가 시행한 경제정책으로, 국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자유 시장의 문제점을 해소하려는 의지를 담은 정책이었다. 즉, 공급과잉이라는 자본주의의 내적 문제점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해서 조절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 해결 방식을,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수정한다는 의미에서 '수정 자본주의' 혹은 앞선 초기 자본주의와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후기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경기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도로, 항만, 철도, 댐 건설 등의 공공사업을 추진했다. 그런데 경기침체를 극복하 려는데 왜 갑자기 댐을 건설하는가? 사실 미국에 댐이 더 생긴다고 해서 침체된 경기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댐이 목적이 아니라 댐을 건설하는 과정이 목적이다. 공공사업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고, 그들에게 임금을 주어야 한다. 그동안 일자리가 없던 노동자가 임금을 받으면 생필품을 사게 되고, 사회 전반에 수요가 창출된다. 수요가 생기면 기업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멈춰 있던 공장을 다시 가능할 것이다. 공장을 가능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필요하고, 다시 고용이 활성화되어 노동자들의 소득이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 소비가 촉진될 것이다. 실제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수정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의 싱공을 거뒀다. 미국 경기는 차츰 회복되었다.
  • 여기까지 듣고 한국 사회를 생각해보면, 뉴딜정책의 사례가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인 것처럼 보인다. 한국도 만성적인 청년실업이 문제이고 이로 인해 장기적인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뉴딜정책처럼 정부 차원의 공공사업으로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매우 좋은 방안 아니겠는가? 다만 이런 비교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대공황 당시의 산업구조와 지금 한국사회의 산업구조가 동일하다는 전제다. 하지만 과거 미국의 상황과 현저 한국의 상황에는 차이가 있다. 대공황 당시 미국의 산업구조는 제조업 중심이었고, 육체노동 중심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산업구조는 서비스업 중심이다. 한국 청년들은 더 이상 육체노동을 원하지 않는다. 이미 육체노동을 요구하는 중소기업의 공장들은 일손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정부가 개입한 대규모의 공공사업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일자리 창출로 인한 개별 노동자의 이익보다는 기계화된 산업시설을 갖춘 특징 기업들의 이익이 될 가능성이 크다.
  •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지금 세 국가의 대공황 극복 방안을 알아보고 있다. 우선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자본주의를 수정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 다음은 러시아다. 러시아는 자본주의를 수정한 미국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공급과잉이라는 문제점을 내포한 자본주의를 폐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따르면 공황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태생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내버려 두어도 어차피 자연스럽게 붕괴할 것이다. 다만 러시아는 붕괴를 앞당기기로 했다. 그래서 혁명이라는 인위적인 과정을 거쳐 자본주의를 폐기하고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선택했다. 혁명 이후 러시아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으로 명칭을 전환했다.
  • 그런데 러시아가 공산주의로 돌아선 것은 1929년의 대공황 이후는 아니다. 러시아 공산주의는 1917년 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었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대공황 이전에 자본주의를 폐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들이 대공황으로 경기 침체를 경험하던 시기에, 반대로 러시아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안정적으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살펴볼 국가는 독일이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고 있는 중에, 설상가상으로 대공황까지 겹치자 국가적 파산에 직면했다. 물가는 치솟고 화폐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수레에 마르크화를 가득 싣고 가도 빵을 사기에 부족할 정도였다. 국민의 고통과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때 모든 독일인을 구원해줄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히틀러다.
  • 히틀러는 독일이 경제적으로 이러움을 겪는 것은 전쟁배상금 때문임을 밝히고, 자신이 전쟁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며 독일인을 선동했다. 그리고 위대한 독일 민족이 이렇게 초라해진 원인에 대해 철학적 견해도 제시했는데, 그것은 독일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이 너무도 좁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에 따르면, 각 민족은 자신의 민족성에 어울리는 영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토는 곧 민족의 영혼과 직결된다. 그런데 지금의 독일 영토는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에 의해서 더 좁아졌다. 게다가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독일 민족의 영토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의 영토가 오염되면서 위대한 독일 민족의 영혼이 고통받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오염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 것이 독일의 영토에 살고 있는 저열한 유대인이었다. 독일 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위해, 영토를 순결하게 청소할 필요가 있었다. 이로써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시작되었다.
  •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전쟁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고 민중을 선동했다. 그 결과 독일민족사회주의 정당인 나치당이 민중의 열렬한 지지로 집권당이 되었다. 일단 집권을 하긴 했는데, 히틀러는 고민에 빠졌다. 민중에게 전쟁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고 장담해놓았긴 한데 영국, 프랑스와 다시 협상하자고 하기는 힘들 것 같고, 방법이 없었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다시 전쟁을 해서 이기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전쟁에서 패해 배상금을 물고 있는 것이니, 승리하면 배상금을 물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 그런데 생각해보니 문제가 있었다. 전쟁을 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경제공황과 배상금 때문에 독일의 재정은 충분하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가서 너희들과 다시 싸우려 하는데 자금이 부족하니 돈 좀 빌려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히틀러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독일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 생각난 것이다. 그들은 부유하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전쟁을 하면 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재산을 몰수하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이고, 독일인도 쉽게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철학적 정당화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민족성과 영토를 연결한 히틀러의 생각이 탄생했다. 위대한 민족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땅이 필요하다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독일 민족에게 먹혀들었다. 독일인은 열광했다.
  • 대공황 해결 방안

        ① 미국 : 뉴딜정책 - 자본주의 수정

        ② 러시아 : 공산주의 - 자본주의 폐기

        ③ 독일 : 군국화 - 자본주의 유지

  •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특성인 공급과잉의 문제가 대공황을 불러왔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세 국가의 방안을 살펴보았다. 세 국가는 미국,러시아, 독일이었다. 미국은 뉴딜정책을 통해 자본주의를 수정했다.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지만 수정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 수정 방법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선택하며 자본주의를 폐기했다. 자본주의에 태생적인 문제가 있는데, 문제 있는 경제체제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독일은 군국화의 길을 선택했다.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전쟁배상금을 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가 간 무역에서 독점적 위치를 점유할 수 있다. 혹시 패배한다 하더라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전쟁은 막대한 양의 수요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공급과잉 문제를 일시적으로나마 해소한다. 독일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어쨌든 현재의 최악의 상황보다는 단기적으로 이익이 되므로 전쟁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독일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한 것인가? 미국처럼 수정한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처럼 폐기한 것인가? 독일은 자본주의를 유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공급과잉이라는 특성은 필연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다.

 

 

6.  제2차 세계대전  공급과잉으로 두 번째 전쟁이 일어났다.

  •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치러진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추축국이 되어 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대항해서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 여러 나라가 연합국을 형성했다.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앞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일본은 밑도 끝도 없이 어떻게 갑자기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인가? 그것도 왜 하필이면 지구 반대편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킨 것인가?

 

       추축국 : 독일, 이탈리아, 일본

       연합국 :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호주

 

  •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앞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반발 원인을 논하면서 국가가 왜 전쟁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알아보았다. 당시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자. 중세의 일본에는 천황이 존재했으나, 실질적인 힘은 지방의 영주라고 할 수 있는 막부에 있었다. 막부는 군부정권으로 통치권자인 쇼군이 통치했다. 중세의 끝인 19세기 중엽이 되면, 일본은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시작으로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근대화를 '메이지유신'이라고 한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의 막부체제가 종식되고, 천황에 의한 중앙집권적 통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열강들의 기술, 문화, 제도를 빠르게 받아들이며 국가주도의 산업화가 본격화되었다.
  •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구조에 따라 흘러갔다. 산업화는 자본주의를 낳았고, 자본주의는 공급과잉의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수요를 늘려야 한다.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인 식민지가 필요하다.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를 대상으로 1894년에 청일전쟁, 1904년에 러일전쟁을 일으켜 타이완, 조선, 사할린을 식민지로 얻었다. 그러나 발전을 계속하던 일본도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더 큰 시장인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의 세계 열강 모두가 꿈꾸는 광활한 시장이었고, 이에 따라 일본은 이들과 대립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 독일과 일본이 추축국으로 동맹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이 같았기 때문이다. 과도한 공급량을 해소하기 위한 식민지의 확보, 그리고 무역협정에서의 국가적 우위. 그렇다면 연합국은 어떤 목적으로 전쟁에 대응했는가? 정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정의와 자유를 위한 도덕적인 전쟁이란 없다. 자국의 시장인 식민지를 지키고 독일, 일본과의 무역협정에서 계속 우위를 점하기 위해 대응한 것이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얻으려는 국가와 식민지를 지키려는 국가 간의 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 결과적으로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1945년 5월에 독일이 먼저 항복했고, 같은 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핵폭탄이 투하되고 나서야 일본은 천황제를 유지하는 대신 무조건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날이 15일이었다. 그래서 1945년 8월 15일은 인류 역사에서 세계대전 종전일이 되었다.
  • 일본의 식민지였던 지역의 관점에서는 광복절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근대도 저물었다. 역사는 현대로 나아갔다.

 

7.  냉전 시대  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대립하는가

 

  • 전쟁이 끝나고 세계는 새롭게 재편되었다. 세계 역사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 사회는 전쟁으로 황폐해졌다. 대신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미국과 소련은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과 일본에 맞서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그것은 불안한 동맹이었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이질적인 체제로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경제체제 때문이었다.
  • 대공황 이후 미국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후기 자본주의를 선택했고, 소련은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체제를 중심으로 세계는 팀을 나누어 재편되었다.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국가로는 미국, 서유럽, 일본, 한국 등이 있고 공산주의 국가로는 소련, 동유럽, 중국, 북한 등이 있다.

 

      미국 - 자본주의

      소련 - 공산주의

 

  • 두 세계는 체제와 군비 경쟁으로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막대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국가가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전 세계적인 핵전쟁을 의미했다. 실제로 현재까지도 미국과 러시아는 대략적으로 각각 7,000기와 7,300기가량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에 미국과 소련이 직접 전쟁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물론 전면전으로 갈 수 있는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으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대신 다른 국가들에서 국지적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위기,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이다. 이렇게 미국과 소련의 전면전 없이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고 체제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이 냉전 시대의 특징이다. 냉전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1945년부터 소련이 개혁과 개방을 외치며 해체된 1991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다. 도대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왜 싸워야 하는 것일까? 그냥 두 체제가 각자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서로 간섭하지 않고 말이다. 어떤 국가는 자본주의를 선택하고, 다른 국가는 공산주의를 선택하면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싶은 국가로 가서 살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도대체 두 체제는 왜 대립하려고만 하는 것인가? 
  • 냉전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결과 갈등을 말한다. 자본주의는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시장이 필요한데, 공산주의가 확장되는 것은 곧 시장의 축소를 의미하므로 자본주의에 위협적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시장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냉전의 위기도 시장 확보를 위한 경쟁이었던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의 이념적 특성이 자본주의를 내적으로 붕괴시킬 가능성을 가진 까닭에 자본가는 이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세계를 떠돌며 자본가와 자본주의 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미국과 소련의 대결 국면은 소련의 경기침체와 체제의 비효율성이 드러나며 급격한 전환을 맞이했다. 소련의 연방들은 더 이상 소련의 리더십을 신뢰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소련은 개혁과 개방 정책으로 선회했고, 1991년 12월 26일, 마침내 소련은 러시아와 15개의 신생 공화국으로 해체되었다. 냉전은 종식되었다. 미국과의 화해와 긴장완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이를 데탕트(détente)라고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은 자본주의 독주 시대가 찾아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8.  신자유주의의 탄생  새롭고 독특한 경제체제의 세계

  • 냉전의 종식은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했다. 공산주의가 없는 세계에서 자본주의는 빠르게 확산되어, 1991년 이후 30여 년간 세계는 자본주의화되었다. 하지만 냉전 이후의 자본주의는 냉전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성격이 달라졌다. 냉전 이전의 자본주의는 대공황 이후 정부의 시장 개입을 강조하는 후기 자본주의 체제였다.
  • 반면 냉전 이후의 자본주의는 정부의 개입을 비판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비판하고 자유 시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는 신자유주의라는 매우 소비적이고 시장중심적인,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매우 독특한 세계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살지 않았던 과거의 사람들은 우리하고는 너무도 다르게 살았을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 만큼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고, 생활했을 것이다.

 

출  처 :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