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1948년 8월 15일의 정부 수립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뉴라이트(신우익) 세력의 역사 해석이 논란이 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역사 논쟁을 넘어, 친일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확산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뉴라이트는 과거 일제 식민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친일파의 역할을 정당화하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 현재 윤석열 정부에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활동하던 친일 인사들과 반국가적 성향을 가진 뉴라이트 세력이 결집하며, 한국 사회 전반에 일본의 영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강화하고 있다.
1. 친일파의 기원과 역사적 배경
① 구한말: 친일 세력의 등장
한국에서 보수 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는 1800년대 후반,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당시 권력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의 희생을 강요했고, 조선은 외세의 침략에 취약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했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청나라를 끌어들이며 오히려 나라를 더 위험에 빠뜨렸다.
이후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1905년 을사늑약이 이어지면서, 일본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고, 일본의 힘을 등에 업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친일 세력(을사오적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보수를 자처했지만, 실상은 민족을 배신하고 권력을 탐한 수구 세력이었다.
②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확장과 민족 배신
1910년 경술국치(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조선을 영원한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해 무단통치를 강행하며 조선인들을 감시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즉결 처형했다. 또한,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문맹 정책과 사상 통제를 시행했다.
이에 맞서 조선에서는 두 가지 독립운동 노선이 등장했다.
- 애국계몽운동: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계층의 교육·계몽 활동
- 무장 독립투쟁: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우당 이회영의 신흥무관학교 등
하지만 친일파들은 일제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조선인을 감시하고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에 협력하고,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③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조선인의 독립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되었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요청하면서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신뢰를 잃었고, 1925년 결국 임시정부에서 탄핵되었다.
이후 일본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회유적인 문화통치로 정책을 변경하며, 조선 내 친일 지식인과 종교인을 적극 활용했다. 이들은 일제 식민사관을 옹호하며, 조선인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문제 삼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다. 또한, 독립운동가를 밀고하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2.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파의 전쟁 협력과 민족 배신
① 1930~40년대: 전쟁을 위한 민족 말살 정책
1930년대 일본은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 위기를 겪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과 만주를 군수산업 기지화하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하기 위해 민족 말살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 조선어 사용 금지,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
- 강제 징용 및 위안부 동원
- 천황 숭배와 신사참배 강요
이 과정에서 친일 지식인과 종교인들은 일제의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을 전쟁터로 내모는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같은 언론은 일제의 천황을 찬양하는 기사를 지속적으로 게재하며, 조선인의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려는 선동을 벌였다.
② 기독교계의 친일 행보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 중 일부는 교회의 생존을 이유로 신사참배를 받아들였고, 심지어 천황을 신으로 인정하는 예배까지 드렸다. 이에 반대하던 주기철 목사 같은 이들은 친일 목사들에 의해 배척당하거나 탄압을 받았다.
③ 독립운동의 지속과 친일파의 특권
이러한 친일파들의 배신 속에서도 백범 김구와 윤봉길 의사가 이끈 한인애국단을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친일 인사들은 일제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조선의 독립을 막기 위해 앞장섰고, 해방 전까지 온갖 특권과 부귀영화를 누렸다.
3. 1945년 해방과 새로운 질서
① 갑작스러운 해방과 군정의 시작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조선은 갑작스럽게 해방을 맞이했다.
-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38선을 기준으로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점령하며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었다.
- 9월 7일, 미국 맥아더 장군이 ‘38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인민에 대한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다.
- 다음 날,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 육군 24군단이 인천을 통해 서울을 점령했고, 9월 9일에는 미군정이 남한에 대한 군정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② 미군정의 정책과 신탁통치 계획
- 미국은 1943년 카이로 회담과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조선의 향방을 논의하며, ‘신탁통치 후 독립’ 방안을 구상했다.
- 이는 소련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한반도를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로 편입시키려는 전략이었다.
- 미국은 일본을 반공 거점으로 삼고 재건을 지원하는 대신, 한반도를 분단시켜 남한을 신탁통치하려 했다.
4. 미군정의 친일파 활용과 독립운동 세력 배제
① 친일파의 생존과 기득권 유지
-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독립운동 세력 대신 친일파 관료, 경찰, 군인들을 적극 활용했다.
- 미군정은 한반도에서 영향력이 컸던 중도 세력과 좌파를 견제하고, 친미 성향의 지주·부르주아 계층을 적극 기용했다.
- 미 국무부에서는 "일본에 협조한 법조인과 경찰을 제거하라"고 지시했지만, 미군정은 이들을 그대로 기용하며 통치를 강화했다.
-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을 ‘조선의 재산’이 아닌 ‘미국의 적국 재산(적산)’으로 규정하여 미군정이 관리하며, 친일 경제 세력에게 유리한 구조를 조성했다.
② 독립운동가들의 소외와 핍박
-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후 조국에서 환영받기는커녕,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 등은 미군정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다.
- 반면, 일본에 부역했던 관료·경찰·군인들은 다시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며 기득권을 유지했다.
- 친일파들이 재등장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은 박해를 받았고, 결국 많은 이들이 월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4. 독립운동가들의 월북 이유
① 친일파가 득세하는 남한에 대한 배신감
-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이후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자신들이 오히려 핍박받고,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는 상황에 분노했다.
- 친일파들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감시하고 탄압했으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② 북한의 적극적인 친일파 청산 정책
- 북한은 친일파를 철저히 처벌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중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 이에 따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북한의 체제가 더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③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
-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대다수 민중들에게, 공산주의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여겨졌다.
- 동학농민운동, 기독교 등에서 자유와 평등을 경험했던 일부 엘리트들도 공산주의에 쉽게 공감했다.
- 그러나 결국 공산주의 역시 또 다른 독재 체제로 변질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5. 미군정의 친일파 중용과 독립운동 세력 약화
- 미군정은 남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친일파 엘리트들을 통치의 도구로 활용했다.
-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들에 의해 정치적·사회적으로 배제되었고, 남한 내 주도권을 잃었다.
- 결과적으로 남한에서는 친일 극우 세력(이승만 중심)과 극좌 세력(박헌영 중심)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6.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와 신탁통치 논란 (1945년 12월)
①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방안
- 미국, 영국,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3국 외상 회의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
- 미국은 한반도를 4개국(미·영·중·소) 신탁통치 후 독립시키자는 방안을 제안했다.
- 소련은 한국의 정당 및 사회 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독립시키자는 방안을 주장했다.
② 친일 언론의 가짜 뉴스 조작
- 그러나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거짓 기사를 보도했다.
- 실제로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이었지만, 이 기사는 조선인들에게 강한 반소·반공 감정을 심어주었다.
③ 이승만 세력의 정치적 전략
-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 우익 세력은 반소·반공 감정을 이용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독립운동처럼 포장했다.
- 친일 언론과 정치인들은 ‘반공’ 프레임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친일 전력을 은폐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독립운동가로 포장했다.
- 친일파들은 반공을 내세우며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했다.
7. 결론: 해방 이후 남한에서 친일파가 득세한 과정
- 해방 후 친일파들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정치·경제적으로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적으로 배제되었고, 일부는 북한으로 이동하며 남한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
- 친일 언론과 정치인들은 가짜 뉴스와 이념 갈등을 조장하며 친일 경력을 숨기고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 결과적으로, 남한의 초기 정치·경제 구조는 친일파들이 주도하게 되었고, 그 영향이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출 처 : ChatGPT 4o
이인애의 정치루킹 유튜브 2024.08.28
친일파 뉴라이트 세력의 실체를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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