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유명 정치인(교수, 기자) 칼럼과 도서45 5화 츤데레, 이낙연 “국무총리 시절, 모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식당 주인에게 인사를 하며 수행과장을 가리켜 ‘이 친구도 고향이 전주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NY를 수행하는 과장과 식당 주인의 고향 모두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행과장은 종일 이 얘기를 자랑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소소한 일화이지만, 무심한 듯했던 직장 상사가 불쑥 던진 자신에 대한 관심을 발견하게 되면 거기서 오는 감동은 꽤 큰 모양입니다.” - <이낙연은 넥타이를 전날 밤에 고른다>, 양재원 지음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의 의원실에서 오래 근무한 그의 측근인 양재원 전북도 디지털소통팀장은 2020년 1월 발간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낙연 전 대표에 대해 일본어인 ‘츤데레’(ツンデレ)라는 표현을 썼다. 츤데레는 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2025. 1. 27. 4화 마이웨이’ 걷는 尹…그가 말했던 검찰이 망하는 지름길은? 엉킨 실타래를 풀려고 하다 보면 더 꼬이게 된다. 쾌도난마(快刀亂麻)로 과감하게 끊어낼 건 끊어내고 버릴 건 버려야 한다. 측근이고 ‘내 새끼’여도 엄정하게 읍참마속(泣斬馬謖)을 한 결과 수천 년 뒤에도 제갈공명은 추앙받고 있다.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언행은 국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국민을 향해 ‘어퍼컷’을 날리고 있다. 5가지 테마로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살펴봤다.① 인사 : “인사로 국민 달랠 기회 날려”과거에 대통령이 느닷없이 국면 전환 차원에서 인사를 하던 시절에도 책임을 물을 뭐가 있어야 했지, 그냥 사람을 바꾼 적은 없다.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많은 언론과 야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2일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선을 그었.. 2025. 1. 8. 3화 저 선배랑 놀면 시험 못 붙는다, 윤석열 “저 선배랑 놀면 시험 못 붙는다” 후배들이 피해 다녔던 ‘신림동 신선’ 어떤 음악을 듣거나 어떤 영화를보거나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오감이 자극될 때 추억으로 소환되며 함께 했던 사람이 떠오를 때가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강렬하게 느꼈던 순간의 감각이 되살아나기도 한다.그는 처음 술자리부터 강렬한 인상을 줬다. 어느 날 저녁 한 식당에서 ‘1차’가 끝날 무렵 누군가 한잔 더 하러 가자며 2차를 제안했다. 말석에 앉아 ‘소맥’을 잇따라 마시고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였다. 귀가할 분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길을 걸어가며 지하에 있는 위스키바에 들어갔다.그는 전혀 취한 기색이 없었다. 위스키(아마 싱글몰트 위스키였을 것이다)를 주문한 뒤 야구공 같은 얼음을 위스키 잔에 넣었다. 온 더 락으로 위스.. 2024. 3. 19. 2화 절대 정치안할 사람, 한동훈 그런데 요즘” “정치인 다 됐다. 여직원들이 1 대 1 사진 촬영을 요청할 때마다 싫은 기색 없이 응했다더라.”지난달 22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하 존칭생략)이 참석한 춘천지검 속초지청 개청식에 다녀온 한 검찰 간부는 이 같이 전했다고 한다.법무부 장관은 정무직 공무원이다. 검사 출신이 많이 임명되지만 검사 신분은 아니다.정무직 공무원선거로 취임하거나 임명할 때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공무원. 고도의 정책결정 업무를 담당하거나 이러한 업무를 보조하는 공무원으로서 법률이나 대통령령(대통령비서실 및 국가안보실의 조직에 관한 대통령령만 해당한다)에서 정무직으로 지정하는 공무원(국가공무원법 2조 3항 1호) 한동훈이 장관에 취임한 지 240일이 넘었다. 취임식 영상만 유튜브와 방송을 통해 수백만 명이 볼 정도로 대중들의 관심.. 2024. 3. 19. 1화 조선 제일검, 한동훈 ‘조선제일검’ 한동훈 법무장관이 상가에 가지 않는 이유 [황형준의 법정모독]황형준 기자입력 2023. 1. 6. 12:00수정 2023. 2. 2. 11:49떡잎부터 눈에 띤 ‘워커홀릭’ 한동훈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다. 검찰 선배들에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하 존칭 생략)이 딱 그런 평가를 받았다. 사법연수원에 합격한 뒤 남들은 그동안 공부하느라 놀지 못한 것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음주가무를 즐기고 마작과 골프 등을 배우기 바빴다는 군법무관 시절에 강릉 공군 제18전투비행단에서 근무하던 한동훈은 소속 부대 영관급 간부를 혼자 인지수사해 수뢰죄로 구속시켰다.이 때부터 검찰 조직에서 한동훈을 눈여겨봤다는 게 한 검찰 출신 변호사의 전언이다. 그는 평검사 시작부터 탄탄대로였다. 사법연.. 2024. 3. 19. 11-6-20. 북 핵으로 촉발된 한반도 정세 북 핵으로 촉발된 한반도 정세 권오중 / 2019-02-21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북한 정권의 핵무기 개발은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통해서 그 실체가 최초로 세상에 드러났다. 북한정권은 이후 2차 핵실험(2009년 5월 25일), 3차 핵실험(2013년 2월 12일),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 5차 핵실험(2016년 9월 9일), 6차 핵실험(2017년 9월 3일)까지 모두 6차례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1~6차 핵실험이 감행되는 동안 그 시기는 점차 빨라지며, 핵폭탄의 강도는 점점 증가되었다. 북한이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보유국의 지위를 얻으려면 핵탄두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Intercontinental .. 2023. 12. 29. 11-6-19.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와 북 핵 개발의 원인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와 북 핵 개발의 원인 권오중 / 2019-02-07 1953년 6.25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이후, 이승만은 곧바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외교 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다자간 안보동맹을 통해 공산주의의 침략을 원천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는 포츠담 회담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 H. 트루먼에 의해 시작된 대 공산주의 봉쇄정책, 즉 집단적 안보체제를 통해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미국의 국제적 안보전략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이승만이 미국의 대 공산주의 전략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1949년 미국의 주도로 NATO가 창설되기는 했지만,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 등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비협조로 인하여, NATO는 곧바로.. 2023. 12. 27. 11-6-18. 6.15 남북공동선언과 햇볕정책의 실제적 의미와 목적 6.15 남북공동선언과 햇볕정책의 실제적 의미와 목적 권오중 / 2019-01-24 2000년 6월 15일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이 합의했던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 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 2023. 12. 26. 11-6-17. 연방제 통일안의 논리적 모순 연방제 통일안의 논리적 모순 권오중 / 2019-01-17 연방제 남-북 통일 방안이 최초로 등장했던 것은 1960년 8월 14일 김일성의 '8.15해방 15주년 경축대회’ 연설이었다. 당시 연방제는 “과도적 대책”으로 남-북의 현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양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방식의 연방제를 의미했다. 김일성이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했던 배경에는 첫째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서 양 진영에서 세력균형에 입각한 현상(Status quo)유지 분위기에 따른 양 진영 간의 긴장완화 기조, 그리고 이와 더불어 둘째 4.19 혁명을 통해 집권한 민주당 정권이 과거 이승만 정권과 비교하여 유화적인 대북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이승만 정권이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제안.. 2023. 12. 23. 11-6-16. 냉전과 동서 데탕트 그리고 7.4 공동성명 냉전과 동서 데탕트 그리고 7.4 공동성명 권오중 / 2019-01-09 제2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이유 체제’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렸다. 사실 무조건 항복이 아닌 상태에서 이뤄진 베르사이유 조약은 연합국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으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추축국들에게 전적으로 책임과 배상을 요구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실제로 연합국들은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 지역을 점령하지 않았다). 그래서 1920~1930년대 초반에 걸친 베르사이유 체제 속에서 추축국들은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1929년 세계경제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독일(나치독일)의 동맹국들이 더 이상 베르사이유 조약을 이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서, 독일(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제1차 세.. 2023. 12. 22.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