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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政治)를 정리(整理)해 드립니다
8. 유명 정치인 칼럼과 도서/8-1. 김누리 중앙대 교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독일의 68세대와 한국의 86세대

by organizer53 2023. 9. 14.

오늘의 독일은 68세대의 작품이다. 부조리한 세계, 억압적인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했던 68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한 세대가 오늘의 독일을 만든 것이다.

 68세대는 나치 전력을 가진 자가 수상이 되는 파렴치한 나라를 철저한 ‘과거청산의 나라’로 바꾸어놓았고, ‘라인강의 기적’ 속에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던 나라를 모범적인 복지국가로 변화시켰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감행’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동서독의 오랜 적대를 허물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젖힌 동방정책을 발전시켰다. 한마디로, 68세대는 ‘새로운 독일’을 탄생시켰다.


68세대의 지지에 힘입어 전후 최초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브란트 정부는 68세대의 꿈을 현실로 옮겼다. ‘경쟁은 야만’이라는 철학 아래 경쟁을 금하고 아이들에게 자유와 행복감을 만끽하게 하는 학교, 학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연구보수’라는 명목으로 생활비까지 주는 대학,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검소하고 유능한 의원들로 채워진 연방의회, 노동자들이 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업, 100만 난민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민사회. 이것이 68세대가 만들어낸 독일이다.


한국에서 독일의 68세대에 조응하는 세대는 86세대(386세대)이다. 86세대는 폭압적인 군사독재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고, 민주적인 국가, 정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꿨다. 이들의 용기와 사명감은 독일의 68세대보다 뜨거웠다.
독일의 68세대가 브란트 정부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고 사회 개혁의 중심세력이 됐던 것처럼, 한국의 86세대도 김대중 정부로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노무현·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개혁정부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의 오늘도 상당 부분 86세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68세대처럼 한국의 86세대도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는가. 학생은 살인적인 경쟁에서, 대학생은 경제적인 압박에서, 청년은 실업의 고통에서, 노동자는 해고의 불안에서, 실업자는 생존의 공포에서, 여성은 성적 억압에서 해방되었는가. 사회는 더 평등해지고, 국가는 더 정의로워졌는가. 국민은 더 행복해졌는가. 알다시피, 한국 사회는 점점 더 ‘헬조선’, 즉 시대착오적인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86세대는 정치 민주화에는 기여했으나, 사회를 질적으로 변혁하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왜 실패한 것인가.


첫째, 정치적 비전이 빈한했다. 독일의 68세대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꿨던 반면, 한국의 86세대는 군사독재 타도가 일차적인 목표였다. 68이 사회의 ‘전면적 해방’을 모색했다면, 86은 정치 민주화라는 ‘특수한 해방’에 집중했다. 한국 사회가 정치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화, 경제민주화, 문화민주화는 여전히 요원한 현실은 해방적 상상력의 빈곤에 기인한다.


둘째, 도덕적 우월감의 덫에 갇혔다. 86세대의 적수는 언제나 ―자유롭고 평등한 이상사회를 꿈꾸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기득권을 고수하려 온갖 편법을 서슴지 않는 기회주의적 수구세력이었기에, 이들은 늘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것이 이들을 무능하게 했다. 이미 사라졌어야 할 역사의 유령과 싸우다가 그들 자신도 역사의 퇴물이 되어갔다.


셋째, 파시즘의 역설 때문이다. 86세대는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파시즘의 야만과 싸운 세대이다. 이 위대함이 일상에서 이들의 한계가 되었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라는 브레히트의 예리한 통찰처럼, 86세대는 밖으로는 파시즘과 싸우면서 안으로는 파시즘을 키웠다. 이것이 오늘날 회자되는 ‘꼰대론’의 연원이다.


86세대의 실패는 이 세대의 비극을 넘어 한국 사회의 비극이다. 한때 정의를 외치며 자신을 희생했던 세대의 정치적 실패는 사회 전반에 더 큰 실망감과 좌절감,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를 퍼뜨린다. 지금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는 거대한 무력감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이 86세대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다. 재벌개혁, 정치개혁, 교육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을 결연히 감행하여 100년 대한민국을 ‘새로운 대한민국’의 원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후세대에게 ‘지옥’을 넘겨주지 않는 것, 이것이 86세대에게 남겨진 마지막 시대적 소명이다

 

 한겨레  2019-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