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전 경찰청 남영동 대공분실에 들어선 ‘인권센터’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대학생 박종철을 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로 인해 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역사의 현장에,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을 이끈 김근태를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게 한 악명 높은 ‘남영동’에, 이때 처음 가보았다.국가폭력의 상징인 ‘남영동’이 저잣거리의 한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중학생 시절 매일같이 지나다니던 바로 그 거리였던 것이다. 고만고만한 회사와 호텔과 음식점이 모여 있는 범용한 공간에 극악한 폭력이 은밀하게 자행된 야만의 장소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잔혹한 고문의 현장이 평화스러운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습이 그로테스크했다.건물 내부는 으스스했다.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달팽이형 철제 계단이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박종철에게 물고문을 가한 5층 고문실은 생각보다 좁고 정갈했다. 여기서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년이 야만적인 국가폭력에 희생됐다니,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엄습했다.사실 내게 박종철 고문실보다 더 끔찍했던 곳은 건물 바깥 정원처럼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잡은 테니스장이었다. 그건 테러 속의 목가였다. 그것을 본 순간 감전된 듯 찌릿한 전율이 등골을 스쳐갔다.
고문 경찰들이 ‘일’하는 사이사이에 밖으로 나와 서로 낄낄대며 테니스를 쳤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곳은 국가폭력보다 더 잔혹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죽음의 수용소’ 소장 아이히만에게 진실로 경악스러운 점은 그가 너무도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누구나 홀로코스트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에서 ‘악의 평범성’에 경악했다면, 나는 남영동 테니스장에서 ‘악의 일상성’에 전율했다.
악은 특수한 인간에 의해 특수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자행된 것이 아니다. 악은 평범한 인간에 의해 아주 일상적으로 아무런 가책도 없이 행해졌던 것이다. 그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남영동 고문실이 국가폭력의 야만성을 증언한다면, 그곳의 테니스장은 악의 일상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테니스를 치면서 고문을 하는’ 세상, 즉 악이 일상화되고, 폭력이 상습화된 우리네 세상살이의 모습을 처연하게 폭로한다.
이 테니스장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테니스장 자리에 ‘민주화운동기념관’을 짓고자 하고, ‘남영동대공분실 인권기념관 추진위원회’는 원형 보존을 원한다. 둘 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나는 원형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테니스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악의 일상성, 폭력의 편재성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악행과 폭력에 둔감한지를 현시한다.
‘민주화운동기념관’은 반드시 지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곳에, 좀 더 규모와 수준을 높여서 ‘민주기념관’으로 지으면 좋겠다. 남영동의 협소한 공간에 짓는 것은 왠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값하지 못한다는 민망함이 있다. 대한민국 100년을 맞는 올해 ‘민주기념관’ 건립 계획을 수립한다면, 그것은 국가 정체성과 시대정신에 완전히 부합하는 일이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라. 30년 식민의 역사, 30년 독재의 역사를 이겨내며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구었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정체성의 양대 축이다. 독립운동의 역사가 ‘독립기념관’으로 정리되었듯이, 이제 민주화운동의 역사도 ‘민주기념관’으로 정립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마침 광화문 인근의 송현동 부지에 호텔을 지으려던 대한항공의 계획이 최종적으로 취소되었다는 보도가 들린다. 어쩌면 이것은 역사의 계시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곳이야말로 민주기념관을 지을 최적지가 아닌가.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역사에 걸맞은 기념관은 최소한 송현동 부지 정도의 규모는 되어야 한다. 게다가 송현동은 ‘광화문 민주주의’의 의미를 온전히 살릴 수 있는 최적의 입지가 아닌가.남영동은 국가폭력과 악의 일상성을 경고하는 체험의 공간으로, 송현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역사를 기념하는 기억의 공간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한겨레 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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