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중실장16 8-5-20. 북 핵으로 촉발된 한반도 정세 북 핵으로 촉발된 한반도 정세 권오중 / 2019-02-21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북한 정권의 핵무기 개발은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통해서 그 실체가 최초로 세상에 드러났다. 북한정권은 이후 2차 핵실험(2009년 5월 25일), 3차 핵실험(2013년 2월 12일),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 5차 핵실험(2016년 9월 9일), 6차 핵실험(2017년 9월 3일)까지 모두 6차례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1~6차 핵실험이 감행되는 동안 그 시기는 점차 빨라지며, 핵폭탄의 강도는 점점 증가되었다. 북한이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보유국의 지위를 얻으려면 핵탄두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Intercontinental Ball.. 2023. 12. 29. 8-5-19.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와 북 핵 개발의 원인 한반도 내 전술 핵 배치와 북 핵 개발의 원인 권오중 / 2019-02-07 1953년 6.25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이후, 이승만은 곧바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외교 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다자간 안보동맹을 통해 공산주의의 침략을 원천봉쇄하는 것이었다. 이는 포츠담 회담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 H. 트루먼에 의해 시작된 대 공산주의 봉쇄정책, 즉 집단적 안보체제를 통해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미국의 국제적 안보전략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이승만이 미국의 대 공산주의 전략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1949년 미국의 주도로 NATO가 창설되기는 했지만, 유럽에서 프랑스와 영국 등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비협조로 인하여, NATO는 곧바로 정상궤도.. 2023. 12. 27. 8-5-18. 6.15 남북공동선언과 햇볕정책의 실제적 의미와 목적 6.15 남북공동선언과 햇볕정책의 실제적 의미와 목적 권오중 / 2019-01-24 2000년 6월 15일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이 합의했던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 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2023. 12. 26. 8-5-17. 연방제 통일안의 논리적 모순 연방제 통일안의 논리적 모순 권오중 / 2019-01-17 연방제 남-북 통일 방안이 최초로 등장했던 것은 1960년 8월 14일 김일성의 '8.15해방 15주년 경축대회’ 연설이었다. 당시 연방제는 “과도적 대책”으로 남-북의 현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양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방식의 연방제를 의미했다. 김일성이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했던 배경에는 첫째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서 양 진영에서 세력균형에 입각한 현상(Status quo)유지 분위기에 따른 양 진영 간의 긴장완화 기조, 그리고 이와 더불어 둘째 4.19 혁명을 통해 집권한 민주당 정권이 과거 이승만 정권과 비교하여 유화적인 대북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이승만 정권이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제안했던.. 2023. 12. 23. 8-5-16. 냉전과 동서 데탕트 그리고 7.4 공동성명 냉전과 동서 데탕트 그리고 7.4 공동성명 권오중 / 2019-01-09 제2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이유 체제’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렸다. 사실 무조건 항복이 아닌 상태에서 이뤄진 베르사이유 조약은 연합국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으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추축국들에게 전적으로 책임과 배상을 요구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실제로 연합국들은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 지역을 점령하지 않았다). 그래서 1920~1930년대 초반에 걸친 베르사이유 체제 속에서 추축국들은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1929년 세계경제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독일(나치독일)의 동맹국들이 더 이상 베르사이유 조약을 이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서, 독일(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당.. 2023. 12. 22. 8-5-15. 5.16 군사정변의 원인 5.16 군사정변의 원인 권오중 / 2018-12-24 4.19를 통해 이승만-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이후, 1960년 6월 15일에 소집된 국회는 대통령 중심제를 내각제로 대체하기로 의결하였다. 대통령은 여전히 국가원수로서 존재하지만, 정치적 권력은 의회(민의원과 참의원)로 이전되었고, 의회를 통해 총리가 정부를 구성하는 구조였다. 이는 민주당이 한민당 시절부터 추구해왔던 영국식 민주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실시된 1960년 7월 27일의 총선을 통해 상원 격인 참의원 58명과 하원 격인 민의원 233명이 선출되었다. 민의원 233명 중 과반인 117명이 민주당 소속이었다. 현재 국내에서는 4.19를 통한 민주당의 집권이 국내 정치에서 민주화의 시작이고, 국민 모두가 환영했던 사건이었다고.. 2023. 12. 21. 8-5-14. 4.19, 아웃사이더의 혁명 4.19, 아웃사이더의 혁명 권오중 / 2018-12-13 1960년 4월 19일의 시민혁명은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성공했던 민중 혁명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2년에 걸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이 국민에게 쌓여 갔던 상황에서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이승만 대통령 85%, 이기붕 부통령 73%)이 “4.19 혁명”의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기붕의 자살(4월 28일)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하와이 망명(5월 29일) 그리고 자유당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4.19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목적으로 하였을 뿐,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1955년 한민당에서 민주당으로 개명).. 2023. 12. 20. 8-5-13. 휴전조약과 제네바 한국평화회담 휴전조약과 제네바 한국평화회담 권오중 / 2018-11-29 1951년 6월 23일에 UN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J.A. Malik)가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대한 휴전을 제안한 이후 2년여의 지루한 협상 끝에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진영(중국과 북한) 사이에 휴전조약이 체결되었다. 말리크의 휴전제안은 서방진영과 일본과의 평화조약(1951년 9월 8일)을 저지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이는 미국에게 거부되었다. 하지만 지루한 전쟁의 지속은 미국의 국내 여론을 악화시켰고, 전쟁의 종결을 공약한 공화당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취임(1953년 1월)과 스탈린 사망 (1953년 3월)은 자연스럽게 공산진영과 자유진영 간의 휴전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또한 대미 강경자세를 견지했던 전쟁의 당사국 중국도 더 .. 2023. 12. 19. 8-5-12. 6.25 전쟁과 한반도의 2차 분단 6.25 전쟁과 한반도의 2차 분단 권오중 / 2018-11-22 한반도의 1차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구도에 의해 등장했던 포츠담 체제의 동아시아적 결과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포츠담 체제는 6.25 전쟁으로 인하여 종식되었다. 6.25 전쟁은 포츠담 체제로 시작된 냉전의 정점이었던 사건이었다. 북한정권은 이 전쟁을 민족 통일전쟁 혹은 민족 해방전쟁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외부의 시각에서 이 전쟁은 “시험전쟁” 혹은 “대리전쟁”으로 인식되고 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 미국과 자유진영은 공산주의 진영이 의도하는 팽창의 최대치를 확인하고 싶었고, 공산진영도 역시 자신들의 도발에 대한 자유진영의 대응수위를 확인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결국 6.25 전쟁은 제한된 범위에서.. 2023. 12. 18. 8-5-11. 38°선 획정과 한반도의 1차 분단 38°선 획정과 한반도의 1차 분단 권오중 / 2018-11-08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차례에 걸친 분단과정을 겪었다. 한반도의 1차 분단은 일본의 항복이후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지상군 작전권을 38°선을 경계로 나누었던 것이 단초가 되었다. 이는 포츠담 조약이후 포츠담 체제의 범주(미국과 소련 간 이념의 대립)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또한 2차 한반도 분단은 6.25 전쟁 이후 휴전조약에 따른 휴전체제인데, 1차와 2차 분단의 차이점은 분단의 국제법적 책임국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구상된 것은 아니었다. F. 루즈벨트의 구상에 따라 해방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신탁통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45년 5월 8일 나치독일이 항복하자, 태평양에서도 .. 2023. 12. 16.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