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이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민주화 운동
1. 12.12 사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 장악)
-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신 헌법에 대한 통치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였고 이어진 대통령 선거(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에서 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국민들은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사실상 붕괴한 후 5.18 민주화운동이 신군부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힐 때까지 한국에 민주화의 희망이 찾아왔던 기간(1979년 10월 27일 ~ 1980년 5월 17일)을 일컫는 말로 "서울의 봄"이라 하였습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빗댄 것으로 프라하의 봄처럼 서울의 봄도 잠깐의 봄으로 끝났습니다.
- 그러나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군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계엄사령관을 연행하였습니다(계엄은 필요할 때에 군대가 질서 유지를 위하여 나라의 일부를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이후 비상계엄이 계속되었고, 계엄사령관은 최고 지휘관입니다.)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도 계엄사령관이 연행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12. 12 사태, 1979년). 최규하 대통령이 있었지만 전두환이 사실상 제1인자가 되었습니다.
2.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다.
-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가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자 1980년 초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들은 신군부의 퇴진, 계엄령 해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 1980년 5월 15일에는 학생과 시민 수만명이 서울역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서울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신군부는 시위가 확산되자 오히려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가. 5. 18 민주화 운동(1980)
-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 신군부는 무력으로 진압 →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희생
-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이 희생당하였습니다(5.18 민주화 운동, 1980)
나. 6·10 민주 항쟁 (1987년)
- 전두환 대통령 선출(1981) →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탄압 → 국민들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
-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은 갑자기 하야하였고, 이어 신군부의 핵심 인물인 전두환이 통일 주체 국민회의 간접 선거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 그리고 전두환은 헌법을 고쳐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하고 새로운 헌법에 따라 이어 치러진 대통령 선거인단(어떤 단체가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입니다. )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1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 공화국이 출범하였습니다.
-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은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을 통제하였고, 학생을 감시하는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탄압하였습니다. 이에 국민들은 전두환 정부의 강압 통치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6월 민주 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 학생 박종철이 경찰에게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2]에서 각종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 6.10 민주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 진압 후 전두환 정권은 '반제동맹당 사건'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결성기도 사건 등 공안조작 사건들을 발표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 사건 발생 전날인 1987년 1월 13일 김종호 내무부장관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격려 방문하여 당시 진행 중이던 공안사건 수사에 속도를 내도록 압박했고 1월 14일 경찰은 피해자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1985년 10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했고 박종철은 모른다고 했다. 이에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반복했다. 그래도 모른다고 하자 결박당한 두 다리를 들어올려 또 다시 물고문을 가했고, 고문 도중 욕조의 턱에 목 부분이 눌리면서 결국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의식을 잃었다.
- 경찰 측이 부랴부랴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의 의사를 불러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는데, 의사의 언론 증언에 의하면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박종철을 대공분실 부근의 용산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이송을 시도했지만 박종철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 신성호의 취재를 통해 1월 15일 중앙일보 사회면에 최초로 보도되었다. 이후 기자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달려들었다. 이에 치안본부장 강민창(1933 ~ 2018)은 박종철의 사망 원인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고 거짓 시인을 하는 바람에 이것이 정식 사인으로 언론에 발표된다.
- 한편 박종철이 희생하며 구해냈던 선배 박종운은 2000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입당 후 극우-뉴라이트 계열로 변절하여 이명박과 박근혜를 지지하는 등 정치 행보를 걷게 되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 1987년 6월 9일, 다음날(6월 10일) 열릴 예정이었던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만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일부 전경이 시위진압 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것이다.
-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도서관학과)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촬영하였고, 중앙일보,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 이 사건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한열을 동료 학생이 부축하는 모습을 한 외신기자가 촬영하여 전 세계로 보도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에 이어 발생한 일이어서 국민들은 분노하였습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학생이 정부의 폭력 진압으로 희생되는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이 발생하자 제5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가중되었고, 이는 6.10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6.29 선언 직후 노태우가 병문안을 온 적도 있었다.
- 1987년 7월 9일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이라는 이름으로 장례식이 진행되었는데,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경복궁 광화문 앞 → 광주 5·18 묘역 순으로 이동하면서 진행되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 대낮에 길거리에서 한 청년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 훗날 더민주 원내대표가 되는 우상호 총학생회장이 민주국민장 집행위원장을 지냈으며, 위 사진에서 보이듯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의 영정 사진을 들고 선봉에 서기도 했다.
- 이때 문성근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는 아직도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연설을 하는데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광주 2천여 영령' + 25명의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한열의 어머니인 배은심은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출 처 : 나무위키, 위키백과
3. 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 민주화 선언으로 직선제 수용
- 결국, 여당 대표였던 노태우는 학생과 시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 직선제 등의 내용을 담은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 6·29민주화선언은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도덕성·정통성 결여를 지적하는 직선제 개헌요구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나온 선언이다.
- 1985년 2 · 12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세력은 간선제주1로 선출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의 도덕성과 정통성의 결여,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줄기차게 직선제주2 개헌을 주장하였다. 이에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朴鍾哲) 학생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국은 대결국면으로 치달았다. 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는 와중에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 경찰력이 마비되자 정부는 한 때 위수령(衛戍令: 육군 부대가 일정한 지역에 주둔하여, 경비와 질서유지 및 군기의 감시와 군에 딸린 건축물 · 시설물 등을 보호할 것을 규정한 대통령령) 발동과 군 투입을 검토하였으나 온건론이 우세하여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6 · 29선언이 발표되었다. 신군부는 1988년에 개최될 올림픽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위수령이 발동될 징후를 알아차렸던 미국은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를 저지시켰으며, 야당과 신속히 타협하도록 촉구하였다. 따라서 6 · 29선언의 생성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 8개항으로 구성된 주요 내용은 ①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며, ②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대통령 선거법의 개정, ③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김대중(金大中) 등의 사면복권과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사범 석방, ④ 인간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해 개헌안에 기본권 강화조항 보완, ⑤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 ⑥ 사회 각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최대한 보장,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대학의 자율화, ⑦ 정당활동 보장,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 조성, ⑧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해 사회정화 조치의 강구 등이다.
- 노태우 대표는 자신의 제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는 단서를 첨가하였다. 그러자 민정당은 6 · 29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추인하였으며, 전두환 당시 대통령도 특별담화를 통해 대폭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6 · 29선언은 정부와 집권당의 공식입장이 되었고, 결국 4 · 13호헌조치는 철회되었다.
- 이 결과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김영삼(金泳三) · 김대중(金大中) · 김종필(金鍾泌) 후보 등에 맞서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출 처 : 문화재답사여행 네이버블로그 2018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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