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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개신교의 역사 : 해방 직후 서북청년단 한경직부터 한기총 전광훈 까지

by organizer53 2025. 3. 10.

한국 극우 개신교와 정치의 관계 : 역사와 흐름

1. 서론: 극우 개신교와 정치의 결탁

한국의 보수 정치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대규모 개신교 집회가 열립니다. 이 집회에서는 태극기뿐만 아니라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까지 등장하며 정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단순한 종교 행사라기보다 정치 집회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독재 정권의 폭력이나 정책으로 인해 시민이 희생당하는 시점에서 개신교 일부가 정치적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그러나 정치 권력을 위해 특정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집회는 이례적이며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가 있었으며, 개신교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존재했습니다.

최근에는 극우 개신교 지도자들이 개신교 내에서 비판받고 있지만,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특히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과의 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한국 보수 정치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극우 개신교 집회가 열림
  •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까지 등장 → 정치 집회 성격 강함
  •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에서 극우 개신교의 정치 개입이 본격화
  • 최근에는 개신교 내에서도 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 증가
  • 그러나 극우 개신교 지도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큼
  • 특히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과 깊은 관계

 

 

2. 서북청년단과 제주 4·3 사건

  • 2018년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는 제주 4·3 희생자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기도회에서 개신교 단체들은 제주 4·3 당시 희생자들에게 사과하는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그 이유는 개신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서북청년단’이 제주 4·3 당시 학살과 약탈을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 1945년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서 소련군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월남했고, 한경직 목사 역시 1945년 11월 서울로 내려와 영락교회를 세웠습니다. 미국 유학파였던 한경직은 미국의 보수 반공주의자들과 연계되었고, 공산주의를 적대시하는 대표적인 개신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한경직이 공산주의자로 규정한 대상은 단순히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를 실행에 옮긴 조직이 바로 서북청년단이었습니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서울에서 조직되어, 경찰과 군에 대거 편입되었습니다. 특히 군대에서는 ‘서총중대’라는 별도 부대를 형성해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는 핵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제주에서 서북청년단은 도민을 약탈하고 학살했으며, 이 과정에서 개신교 세력과의 연계가 있었습니다.

 

🔹 2018년 4월, 개신교 단체들이 제주 4·3 희생자들에게 사과
🔹 이유: 1948년 제주 4·3 학살을 주도했던 서북청년단과 개신교의 연관성

서북청년단의 배경

  •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개신교와 소련군의 대립 심화
  •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남한으로 월남
  • 한경직 목사, 1945년 서울로 내려와 영락교회 설립
  • 미국과 연계된 반공주의 개신교 지도자로 성장

서북청년단과 개신교의 관계

  • 1946년 서울 종로 YMCA에서 서북청년단 결성
  • 개신교 기반의 반공 조직으로 경찰·군대에 적극 편입
  •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는 중심 세력으로 활동
  • 도민을 약탈하고 학살, 이승만 정권의 지원을 받음

📌 한경직 목사도 서북청년단을 옹호하며 제주 4·3 사건을 ‘공산당 반란’으로 규정함

 

3. 박정희·전두환 정권과 개신교: 조찬 기도회의 시작

  • 이승만 정권이 자리를 잡은 이후, 개신교 지도자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기독교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이승만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개신교 지도자들은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 1966년, 김곤준 목사의 제안으로 ‘국가조찬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임시적 행사였으나, 1968년부터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공식 행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김곤준 목사는 설교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루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며 군사 정권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개신교 지도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뜻’이라며 지지했습니다. 1975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에는 40만 명이 참여했으며, 한경직 목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한 이후에도 조찬기도회는 계속되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으며, 공중파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개신교 지도자들은 전두환을 이스라엘의 ‘여호수아’에 비유하며 그의 정권을 축복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1961~1979)

1966년 국가조찬기도회 시작 (김곤준 목사 제안)
✅ 박정희를 위한 기도로 점차 정치 행사화
1972년 유신체제 선포 → 개신교 지도자들 유신 지지
✅ 1975년 여의도 광장에서 40만 명 규모의 기독교 연합 기도회 개최

💬 한경직 목사: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켜야 한다” → 유신체제 정당화

전두환 정권 (1980~1988)

✅ 1980년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 → 공중파 생중계
✅ 전두환을 이스라엘의 여호수아에 비유하며 축복
✅ 민주화운동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규정

📌 개신교 지도자들은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

 

4. 민주화 운동과 개신교의 두 흐름

  • 그러나 모든 개신교 지도자들이 독재 정권을 지지했던 것은 아닙니다.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발표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소속 지도자들은 반대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유신 체제 반대, 민주화 운동 참여, 1987년 6월 항쟁 당시 개신교 인사들의 활약이 돋보였습니다.
  • 1988년 NCCK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한국기독교 선언’을 발표하며 보수 개신교와 분리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한경직 목사는 보수 개신교 원로들을 모아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창립했습니다.

1️⃣ 독재 정권을 지지한 개신교 지도자들

  •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보수 개신교 세력이 정권과 결탁
  • 1989년 한경직 주도로 보수 개신교 연합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창립
  • 보수 개신교 세력 결집 → 정치 개입 본격화

2️⃣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개신교 지도자들

  •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계열 개신교 지도자들
  • 1970~80년대 유신 반대 운동, 1987년 6월 항쟁 참여
  •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한국기독교 선언 발표

📌 이후 한기총과 NCCK는 정치적 입장에서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됨

 

5. 한기총의 정치 개입과 극우화

  • 한기총은 초기에는 보수 개신교의 연합 조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 노무현 정부를 ‘공산주의’로 규정하며 반대 시위를 주도했고, 이후 극우 단체와 결합하여 거리 행동을 조직했습니다.
  • 한기총은 이명박 정권 시절 4대강 사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박근혜 정권 시절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찬성하는 입장을 냈습니다. 특히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는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하며 강경한 정치적 행동을 보였습니다.
  • 2019년, 전광훈 목사가 한기총 회장으로 선출된 후, 보수 정당과의 결속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한기총을 직접 방문해 “자유한국당과 개신교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이후 한기총과 극우 개신교 지도자들은 ‘문재인 하야 범국민 투쟁본부’를 결성하며 정치 활동을 본격화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2003~2008)

2003년 노무현 정부를 공산주의 정권으로 규정
2004년 탄핵 국면에서 대규모 반노무현 집회 주도
✅ 보수 단체들과 결합해 거리 행동 개시

이명박 정부 (2008~2013)

✅ 2007년 한기총 회장 전광훈 목사: “이명박을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릴 것”
4대강 사업 적극 지지 성명 발표

박근혜 정부 (2013~2017)

✅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찬성
✅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탄핵 반대 집회 주도
한기총의 기도회가 극우 단체들의 사전 집회 역할 수행

📌 이 시기부터 한기총의 극우 성향이 더욱 강해짐

 

6. 최근 극우 개신교와 보수 정치: 자유한국당과의 결탁

  • 한국 개신교와 정치의 결합은 해방 이후부터 지속되었습니다.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군과 경찰에 개입했던 개신교 세력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대형 기도회를 열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민주화 이후 보수 개신교는 한기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강력하게 반대하며 극우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 그러나 현재 한기총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2019년 기준, 개신교 교단 374곳 중 21%만이 한기총에 소속되었으며, 교인 수도 전체 개신교인의 3% 수준에 불과합니다. 한기총은 더 이상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며, 극우 성향의 일부 세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 극우 개신교와 손잡은 보수 정당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개신교의 정치 개입이 지속될지, 변화가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광훈과 자유한국당의 연계

✔️ 2019년 전광훈이 한기총 회장 선출
✔️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한기총 방문 → “자유한국당과 개신교가 뜻을 모아야 한다”
✔️ 2019년 ‘문재인 하야 범국민 투쟁본부’ 조직
✔️ 자유한국당 인사 대거 참여 → 본격적인 반정부 행동 전개

📌 이후 한기총은 극우 개신교 조직으로 변질

 

7. 결론: 극우 개신교와 보수 정치의 미래

🔴 해방 후 서북청년단 → 박정희·전두환 정권과 결탁 → 민주화 이후 한기총 설립 → 보수 정치와 결합
🔴 노무현 정부 이후 적극적인 거리 행동 → 극우 정치 세력과 밀착
🔴 그러나 현재 한기총의 영향력 감소
🔴 2019년 기준, 개신교 교단 374곳 중 21%만 한기총 소속
🔴 전체 개신교인 중 3%만 한기총 소속 →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조직 아님

📌 과거처럼 보수 정당이 극우 개신교 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 유효할까?
📌 보수 정치의 미래와 극우 개신교의 영향력 변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마무리

✔️ 한국 극우 개신교는 보수 정치의 위기 때마다 적극 개입
✔️ 그러나 최근 한기총의 영향력 약화 → 일부 극우 세력화
✔️ 보수 정당이 극우 개신교와 계속 연대할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할지 주목해야 할 시점

 

 

출 처 :  ChatGPT 4.0    유튜브  곰곰이  https://youtu.be/g8f2Zo-LLes?si=VkCCmaXmSTJMv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