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친일파의 생존과 기득권 유지
지난 1편에서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친일파들이 어떻게 일본에 협력하며 권력을 유지했는지,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항일 투쟁을 이어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분단과 전쟁, 독재 정권을 거치며 어떻게 살아남고 기득권을 유지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갑작스러운 해방과 미·소의 점령
(1) 한반도의 분할 점령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며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선은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이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 9월 7일: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38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인민에 대한 포고령을 발표.
- 9월 9일: 미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미군정(USAMGIK,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을 공식적으로 선포.
이러한 결정은 1943년 카이로 회담과 1945년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자고 제안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 미국의 전략적 선택과 친일 세력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을 부흥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친일 세력들을 활용하는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 미국은 한반도를 반공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좌파 세력을 견제하고 친미·반공 성향의 인물들에게 힘을 실어줌.
- 하지만 미군정이 신뢰할 수 있는 행정 경험자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경찰, 군인, 관료들이 다시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미군정과 친일 세력의 결탁
(1) 미군정의 친일 관료·경찰·군인 등용
미국 국무부는 미군정에 **“일제에 협력했던 법조인과 경찰을 숙청하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반도에서 행정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친일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 친일 경찰의 재등용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경찰들은 미군정 치하에서 그대로 기용되었습니다.
- 일제 경찰 출신 노덕술은 대표적인 사례로, 해방 후에도 반공 활동을 명분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며 기득권을 유지했습니다.
- 일제 헌병·고등경찰 출신들이 미군정 경찰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요직을 차지했습니다.
- 친일 관료들의 복귀
미군정은 일제 치하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관료들을 그대로 활용했습니다.
-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의 행정력을 이용하면서 친일 관료들이 다시 행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독립운동가들은 배제되었습니다.
- 결과적으로 일제 강점기의 권력 구조가 해방 후에도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경제적 기득권 유지
미군정은 일본이 남긴 자산(적산, 敵産)을 미국이 몰수한 ‘적국의 재산’으로 규정하고, 이를 친일파 기업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서 부를 축적한 친일 지주·기업인들이 해방 후에도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
- 이는 후에 재벌로 성장하는 경제 세력의 기초가 되었고, 친일 경제 구조가 고착화되었습니다.
(2) 독립운동가들의 소외와 월북
반면, 해방 후 남한에서 독립운동가들은 배척당했습니다.
-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를 탄압
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은 오히려 미군정과 친일파들로부터 냉대와 탄압을 받았습니다.
- 미군정은 김구, 여운형, 김원봉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보다 이승만, 친일파 관료들을 더 신뢰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정치적으로 고립시켰습니다.
- 이에 따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남한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되었고, 일부는 월북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 월북한 독립운동가들
- 남한에서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한 분노
- 해방 후 친일파들이 미군정의 보호 아래 기득권을 유지하며,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는 상황에 절망.
- 북한의 친일 청산 정책
- 북한은 친일파를 숙청하고, 사회주의 체제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부여.
- 공산주의 이념의 영향
- 제국주의를 타파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공산주의가 여겨졌으며,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수용.
하지만 결국 공산주의 체제도 독재로 변질되었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북한 정권에 의해 숙청되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3. 찬탁-반탁 논쟁과 친일파의 기회주의적 행보
(1)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년 12월)와 신탁통치 논란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이 모스크바에서 한반도의 향후 체제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 미국: 한반도를 미·영·중·소 4개국이 신탁통치한 뒤 독립시키는 방안 제안.
- 소련: 조선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독립시키는 방안 주장.
하지만 친일파와 우익 세력은 이를 왜곡하여, 마치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지지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습니다.
(2) 동아일보의 가짜 뉴스 보도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허위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당시 조선인들에게 신탁통치는 또 다른 식민 생활로 받아들여졌고, 이에 따라 반탁(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 이승만 등 친일 우익 세력: 반탁운동을 주도하며 자신들을 ‘애국자’로 포장.
- 친일 언론과 지식인들: 반공 및 이념 갈등을 조장하면서 자신들의 과거 친일 행적을 은폐.
- 좌우 대립 심화: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갈등이 커지면서, 결국 남북 분단의 기반이 조성됨.
4. 결론 및 다음 이야기 예고
이렇게 친일 세력들은 해방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며, 대한민국의 주요 정치·경제·사회적 구조를 장악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친일 세력들이 어떻게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 잡았는지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출 처 : ChatGPT 4.0
[이인애의정치루킹] 친일파 뉴라이트 세력의 실체를 파헤치다 2부 : ‘반공 우익’과 ‘애국자’로 둔갑한 친일파들(상)
https://youtu.be/vV3EF5melIY?si=YhIgU7pibf5s3N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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