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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뉴라이트 세력의 실체를 파헤치다 2부(하) : ‘반공 우익’과 ‘애국자’로 둔갑한 친일파들

by organizer53 2025. 3. 9.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친일파의 기득권 확립

이전 글에서는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결탁해 다시 권력을 잡았고, 독립운동가들은 탄압받거나 월북을 선택해야 했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 세력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기득권을 확립했는지, 그리고 이승만 정권이 어떻게 친일 세력과 결탁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제거했는지를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신탁통치 논란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

(1) 미·소 대립과 한반도의 혼란

1945년 해방 후,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미소 공동위원회’를 개최했지만, 양국의 이념 차이로 인해 회의는 1946년 5월 결렬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분단을 기정사실화했습니다.

이에 반대하며, 중도 좌익의 여운형과 중도 우익의 김규식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들은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고, 김구도 이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 1947년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며 통일정부 수립이 무산됨.
  • 1947년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 운동이 사실상 붕괴됨.

결국,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고, 유엔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정했습니다.


(2)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김구의 반대

1948년 1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지만 소련과 북한은 총선거를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이에 김구1948년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성명서를 발표하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분단을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를 막기 위해 1948년 4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김일성도 북한 정권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2.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의 득세

(1) 정적 제거: 김구 암살과 독립운동가 탄압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친일파들은 정권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독립운동가들은 정적(政敵)으로 몰려 탄압당했습니다.

  •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의 정적인 김구가 육군 소위 출신인 안두희에게 암살당함.
    • 이후 밝혀진 여러 증언과 안두희의 행적을 보면, 김구 암살의 배후에 이승만 정권이 있었다는 정황이 농후했습니다.
  • 이외에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탄압받거나 사망했습니다.
  • 독립운동가의 자녀들은 부모의 행적을 숨기고, 이승만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2) 친일파 청산 방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해체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는 친일파 청산이 중요한 민족적 과제였습니다. 이에 따라 **1948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친일 경찰들은 반민특위를 철저히 방해했습니다.

  • 반민특위 위원들이 ‘공산주의자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구속.
  • 친일 경찰들을 동원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강제 해산.

결국, 1949년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친일파 청산은 실패했고, 친일파들은 오히려 정부 요직을 차지하며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3. 한국전쟁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확립

(1) 6.25 전쟁과 친일파의 기회주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 이승만과 다수의 친일 정치인들은 국민을 버리고 피신했습니다.
  •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조선일보는 ‘우리 민족이 경외하는 수령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음.

전쟁이 심화되자, 친일파들은 반공주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자신들의 과거 친일 행적을 은폐했습니다.

  • “공산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들을 애국자로 포장.
  • 국민들이 친일 행적을 문제 삼지 못하도록 반공 이념을 조장.

(2) 기독교와 반공주의 결탁

한국 기독교는 6.25 전쟁을 거치며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 신사참배에 적극 가담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해방 이후에도 회개 없이 교회를 장악.
  • 반공주의를 신앙과 결부시키면서 ‘공산주의는 사탄’이라는 논리를 전파.
  •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며 기독교인들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

이러한 반공 신앙이 확산되면서, 한국 기독교는 친일파와 협력하며 대한민국 사회를 통제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4. 박정희 정권과 친일파의 재부상

(1) 5.16 군사 쿠데타와 친일파의 생존

1961년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친일파들은 다시 한 번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습니다.

  • 박정희는 경제 개발과 국가 성장을 위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때부터 있었던 친일파들을 그대로 기용.
  • 일부 폭력배와 조폭들은 처벌했지만, 정작 친일파는 그대로 살아남아 권력을 유지.

박정희 정권에서 친일 세력들은 경제·정치·사회적 기득권을 확고히 하며, 대한민국 보수 세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5. 결론 및 다음 이야기 예고

이렇게 친일파들은

  1. 이승만 정권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며 권력을 장악.
  2. 반민특위를 해체하여 친일 청산을 막음.
  3. 6.25 전쟁을 반공 이데올로기로 이용해 친일 행적을 은폐.
  4. 박정희 정권에서 다시 경제·정치적 기득권을 확립.

다음 편에서는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친일파가 어떻게 현대에 들어와 보수를 자처하게 되었고, 뉴라이트가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다루겠습니다.

 

 

 

출 처 :  ChatGPT 4.0 
            [이인애의정치루킹친일파 뉴라이트 세력의 실체를 파헤치다 2부 : ‘반공 우익’과 ‘애국자’로 둔갑한 친일파들(하)
            https://youtu.be/_o4axdIBK1U?si=lppPNOFbvoxMpp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