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의 6∙8 혁명
가. 1968년, 유럽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1968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8명의 청년들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사를 습격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 전역의 대학생 시위와 1,000만 노동자 파업으로 확산된 전례 없던 반체제, 반문화 운동이다. 68 혁명으로도 불리며 반체제에는 전통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도 포함한다.
- 파리에서 시작한 시위는 냉전과 베트남 전쟁 등의 시대적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 해 미국, 서독, 체코슬로바키아, 스페인, 일본 등 세계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들끓게 했다.
- 사실 프랑스의 5월 혁명은 60년대 전체를 아울러서 유럽(특히 서유럽)과 미국에 흐르던 운동이 분수령을 이룬 것이다. 60년대 초반부터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대학생의 열렬한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졌다. 이하의 글에서는 '60년대 전체를 아우른 움직임'을 68운동으로 지칭한다.
나. 6∙8 혁명의 결정적인 원인은 베트남 전쟁
- 베트남 전쟁이 1964년부터 본격화 시작된 시기에 1965년부터 TV가 보급되어 베트남 전쟁의 참사를 전 세계가 보게 되었고,
- 믿고 따르던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보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퍼진 회의감과 분노는 6∙8 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 2차 대전이나 6.25 전쟁과 달리 취약한 명분을 가지고 있던 베트남 전쟁은 전쟁을 치르는 미국도 국내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했고,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대중은 네이팜탄 등 비인도적 살상 무기가 동원된 전쟁의 참상을 실시간 TV로 볼 수 있었다.
- 60년대 중반,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대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반전 운동에 뛰어들었다. 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을 제3세계 국가(북베트남)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보았고 이를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기성 세대가 만들어낸 문제와 다를 바가 없다고 인식했다.
- 당시 왜곡된 채 서방에 선전되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각국의 캠퍼스에서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프랑스의 알제리 전쟁, 미국의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독일의 나치 청산 문제 등 고유한 의제를 던지며 한껏 성장한 각국의 학생 운동권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공통된 의제를 빨아들이며 국제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다. 유럽의 6∙8 혁명의 확산
- 6∙8 혁명은 냉전의 장막을 뚫고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혁명의 불길이 번져 폴란드, 바르샤바, 부다페스트로 번져 프라하의 봄도 일어남
- 유럽의 6.8 혁명은 다시 도버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뉴욕, 그리고 대륙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 LA, 다시 태평양을 건너 일본 도쿄까지 확산되었다.
- 그러나 대한 해협을 넘지 못한 6∙8 혁명은 대한민국에 반세기 동안 문화지체 현상을 만들었다.
라. 6∙8 혁명은 어떤 변화를 이루었나?
- 진보적 입장에서 68년 5월은 정치혁명이라기 보다 억압적이고 고루한 사회 관습을 뒤바꾼 문화혁명의 분수령으로 기억된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티에르는 호주의 일간 ‘에이지(The Age)’에서 “변화가 하루 밤새 일어나지 않았지만, 학교와 가정 직장 등에 걸쳐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라고 주장했다.
- ‘나의 6∙8 혁명’을 펴낸 가이스 마르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혼 경력 등의 화려한 사생활에다 유대계 뿌리가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6∙8 혁명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 변화 덕분이었다”라고 주장했다.
- 6∙8 운동의 큰 의의 중 하나는 당시까지 입을 열 수 없었던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의 소수자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큰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68 운동 당시 새로움, 평등한 연대를 부르짖으며 학생단체들이었지만 그 내부에서도 여전했던 성차별에 여성들은 자신들끼리 연대하여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해 갔다. 대표적인 슬로건으로는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 사실 리버럴한 서양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렇다고 68년 5월이 진보진영에서 무턱대고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를 부추겨 80년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지적과 함께 히피와 마약 문화만을 남겼다는 냉소도 없지 않다. 실업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프랑스의 현 젊은이들에게 68세대가 보보스(BOBOSㆍ부르주아 보헤미안)라는 허울뿐인 자유주의자로 비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위르겐 하버마스나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온건 리버럴 성향 지식인들도 6∙8 혁명의 과격성을 매우 비판했으며,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는 당시 6∙8 운동세력에 대해 '나치나 군국주의자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깠다.
- 이는 거대한 학생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운동은 젊음의 해방구 내지는 분출구로서 그 역할을 한 시대의 조류였다. 그러나 아직도 고루한 사회관습을 바꾼 분수,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이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상기하다시피 첫째,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생생한 현대사인 데다 둘째, 이른바 문화혁명으로서 아직도 삶에 직접적인 영향과 그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구와 판단이 매우 까다롭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겠다.
2. 한국만 몰랐던 6∙8 혁명
가. 한국에서만 6∙8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 6∙8 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발화되어 베를린, 로마로 번지더니, ‘철의 장막’을 넘어 ‘프라하의 봄’을 점화하고, 다시 도버해협을 건너 런던을 불사르더니, 대서양을 넘어 뉴욕, 미국 대륙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닿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도쿄까지 덮쳤다.
- 그러나 이 거대한 세계혁명의 불길은 군사정권이 지배하던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해협은 건너지 못했다.
유독 한국에서만 6∙8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극단적 반공주의, 근대화 담론의 배타적 지배, 세상물정에 어두운 지식인 사회, 언론의 왜곡보도, 아메리카니즘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 한국은 전세계 지식인과 대학생이 반대한 베트남 전쟁에 전투병(32만 명)을 파견한(미국을 제외하면) 사실상 유일한 나라로, 이후 한국 사회를 세계 공론장의 흐름에서 배제된 ‘무지의 골짜기’에 가두고, 삶을 지속적으로 억압해 온 것이다.
- 한국 사회를 "정치 민주화만 됐지, 사회·경제, 문화 민주화는 전혀 안 돼 있는 '포스트 파시즘' 사회"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를 세계적 정신혁명인 '6∙8 혁명'을 우리만 비껴갔기 때문으로 봤다.
- 6∙8 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시작된 저항운동을 일컫는다.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 등 보수적인 가치들을 대체하는 평등, 성 해방, 인권, 공동체주의, 생태주의 등 진보적 가치들이 사회의 주된 가치로 떠오른 전 세계적 정신문화혁명으로 이어졌다.
- "6∙8 혁명을 기점으로 전 세계가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한국은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체계는 세계사적으로 50년 뒤처졌다 “
- 한국 사회는 6∙8 혁명 이전 사회로, 여전히 세계적 흐름에서 50년 뒤진 사회예요. 그렇게 보면 많은 현상이 설명돼요. 예를 들면 지금 미투, 페미니즘, 조국 사태 이런 현상들. 이게 우연히 나온 건 아니죠. 상징성을 가지고 나타났을 뿐이지.
- 안희정,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특권의식은 포스트 파시즘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오는 문제이고요, 프리 68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오는 문제들이에요. 현재 한국은 파시즘의 겉면은 어느 정도 없애놨지만, 파시즘이 남긴 제도·의식은 그대로 남아서 더 강해졌어요. 정치 민주화만 됐지, 사회·경제, 문화 민주화는 전혀 안 돼 있어요.
나. 50년 지각한 한국의 6∙8 혁명
- 우리는 지금 매일같이 ‘50년 지각한 6∙8 혁명’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미투운동’이 보여주는 지극히 취약한 페미니즘과 여성인권, ‘가면 쓴 민주주의’의 현실, 백인 선망과 유색인 차별에서 보이는 외국인에 대한 이중적 태도, 장애인·동성애자·난민 등 소수자에 대한 인권 감수성의 부족, 성해방 의식과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 사회적 정의에 대한 감수성과 반권위주의 교육의 부재 등 일일이 다 손꼽기도 어렵다.
- 6∙8 혁명의 부재 때문에 한국은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부조리한 사회가 되었다. 소외, 자율, 탈물질주의, 반권위주의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사회,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평화주의에 대한 녹색 감수성이 빈약한 사회,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 사회, 군사문화가 생활세계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병영사회가 된 것이다.
- ‘6∙8 혁명’은 세계 어디에서나 해방의 시작을 알렸지만, 한국에서만은 억압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제라도 이 뒤집힌 역사를 바로잡아 6∙8 혁명이 꿈꾸던 사회,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헬조선을 넘어서야 한다.
- 김누리 교수는 한국 사회를 "정치 민주화만 됐지, 사회·경제, 문화 민주화는 전혀 안 돼 있는 '포스트 파시즘' 사회"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를 세계적 정신혁명인 '68 혁명'을 우리만 비껴갔기 때문으로 봤다.
- 6∙8 혁명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시작된 저항운동을 일컫는다.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 등 보수적인 가치들을 대체하는 평등, 성 해방, 인권, 공동체주의, 생태주의 등 진보적 가치들이 사회의 주된 가치로 떠오른 전 세계적 정신문화혁명으로 이어졌다.
- "6∙8 혁명을 기점으로 전 세계가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한국은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체계는 세계사적으로 50년 뒤처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3. 6.8 혁명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상황
가. 6.8 혁명 당시의 대한민국은 군사 독재 정권 시절
- 일본의 과거, 한반도의 현재, 중국의 미래 때문에 한반도의 분단은 동북아의 소통 단절을 가져왔으며 , 분단, 반공주의, 냉전이 남한 사회를 독특한 권위주의 문화, 군사문화가 팽배한 기형사회를 만들었다
나. 박정희의 5.16 쿠데타
- 당시 한국은 전 세계가 반대하는 베트남전쟁에 64년부터 68년까지 4년간 32만명의 지상군을 파병한 유일한 나라였다 (대만은 20명)
- 왜 그 많은 전투병을 전쟁터로 보낸 것일까? 당시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으나, 미국은 박정희의 쿠데타를 좌익 쿠데타로 의심했다. 이에 자신이 좌익이 아님을 확실하게 입증해 내야만 했던 상황이었기에 베트남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파병 제안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나섰던 것이다.
다. 베트남전의 파병과 철수
- 호찌민의 파병요구에 소극적이었던 김일성은 대신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막기 위한 작전을 시작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무장간첩 침투와 휴전선 교전 등 1968년 무려 308회의 무력충돌을 일으킴으로 6∙8 혁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 결국 1968년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철수
라. 한국의 병영사회화
- 전세계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던 그 무렵 1968년부터 한국의 병영사회화는 시작됨
- 한국은 6∙8 혁명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였다
- 간첩색출을 위한 주민등록법 제정, 교육헌장의 반포, 예비군 훈련 시작, 68년에 교련 수업 시작
- 한국은 세계의 흐름에 뒤쳐졌고, 병영사회화 되었다
- 우리에게 너무 당연해져 버린 권위주의, 군사문화, 부족한 인권감수성으로 인해 사회전체가 냉소주의, 패배감, 좌절감을 안고 살게 되었다
- 결국 박정희 시대는 6∙8 혁명을 차단하여, 6∙8 혁명이 추구한 사회와 정반대 되는 사회를 만들었으며, 억압과 굴종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 이러한 한국사회가 된 이유는 70년 가까이 이어진 분단체제와 반공주의와 냉전이라는 상황이 대한민국을 기형사회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 5 · 18 민주화 운동(1980년)
-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짐
-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이 희생당하였습니다
바. 6 · 10 민주 항쟁(1987년)
-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 이를 계기로 일어난 6월 민주 항쟁 (시민들은 민주화, 대통령 직선제 실시 등을 주장하며 전국적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4. 6.8 혁명 지연의 후유증
가. 68 혁명의 부재가 남긴 현상
1. 인권 감수성의 부재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가 부족하다. 특히 난민이나 장애인, 문화적. 성적 소수자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2. 소비주의 문화
지금 한국처럼 소비주의가 이렇게 전면적으로 아무런 비판 없이 번창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미국이 우리와 비슷하지만 거기엔 그래도 반소비주의 문화가 나름대로 전통을 가지고 있다(히피 문화의 유산). 독일에서는 생태 교육이 매우 중요시되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 의식, 생태적 감수성이 높다.
3. 성(性) 범죄
우리 아이들은 대다수가 성과 관련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성이라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고 인권과 관련된 중요하고 예민한 영역이므로 성과 관련하여 충분한 책임 의식을 갖도록 가르쳐야 하고, 성을 악마화해서 아이들에 내면에 죄의식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독일에서는 성폭력이나 성희롱, 성추행 등 성범죄에 대해서 우리보다 훨씬 더 엄한 처벌이 내려진다. 그리고 성교육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루어진다. 성을 신비화하거나 은폐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올바르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4. 교육의 잘못된 방향
본래 교육, 즉 ‘에듀케이트(educate)’라는 말은 밖으로 끌어낸다는 뜻이다. 고유한 재능은 사람 안에 이미 다 들어 있고, 그걸 끌어내는 게 교사의 교육이지 지식을 처넣는 것이 교육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한국에서 배운 교육은 사실 반교육에 가깝다. 우리 교육은 자아를 강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하게 만드는 교육이었다. 늘 학생을 야단치고 벌주고 결국 깊은 열등감을 갖게 하는 방식이었다.
5. 자기 착취
한국은 세계에서 자기 착취가 가장 심한 나라이다. 자기 착취가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자행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노예 감독관은 내 안에 있다’ 노예 상태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자유인의 첫 번째 조건이다.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자유인이 못 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나를 자유인으로 만들고, 노예로 만드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6. 권위주의 사회
최근 한국 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미투운동 혹은 페미니즘 운동도 68 혁명의 부재의 이유 중 하나이다. 이러한 운동은 6∙8 혁명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제야 한국에서 그런 현상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위주의 문화, 병영문화, 군사문화 등을 사회적 공론장에 올려놓아야 하고, 전통적인 가부장 지배와 거기서 배태된 소위 ‘남성성’이라는 개념의 시대착오적 성격을 집중적으로 겨누어야 한다.
'3. 대한민국 국민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 3-3. 사회적인 이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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