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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政治)를 정리(整理)해 드립니다
4. 이념의 갈등, 진영 논리로 양극화된 대한민국/4-3. 15년 민주 보수정권의 변신 실패

4-3-1. 15년 민주보수정권의 역사 (김영삼 대통령 ~ 이회창 대표)

by organizer53 2023. 10. 18.

 

1.  대한민국  민주보수 정권 연대기

 

 

2.  민주보수 세력의  변신

 

3.  군사독재정권과  결별한 김영삼정권

  • 보수정권체제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자 연합에 의한 3당 합당으로 김영삼 문민정부가 탄생하면서 정권을 이었다. 민주진영 출신 김영삼 정권은 문민정부를 표방하고 5 공청산과 하나회 단죄, 광주민주화운동 재평가 등 민주화를 위한 뚜렷한 업적을 남겼지만 보수체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가.  친일 청산 노력

  • 1995년에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시기라서 이에 발맞춰 문민정부다운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그의 일환으로 전국에 있는 일재 잔재유물들을 청산했고, 일본의 한국 지배의 상징 중 하나였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시켰다. 
  • 철거를 발표하자마자 일본에서는 즉시 반발했고 건물을 비싼 값으로 매입하려는 시도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김영삼은 일본 측과 별다른 상의 없이 그냥 강하게 조선총독부를 철거해 버렸다.

 

 

나.  5, 6 공청산으로 군사독재세력과 결별

  • 임기 시작부터 하나회를 해체하면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시켰다.
  • 당초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불기소 처분했으나 김영삼의 강력한 의지로 5.18 특별법을 제정, 사형을 구형하는 데 이른다. 
  • 그리고 이전까지 12.12 혁명이라고 불리던 12.12 군사반란을 반정부 쿠데타로 명명했으며, 광주 사태라고 불리던 5.18 민주화운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피해보상을 진행하였다. 

 

 

 다.  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 실시

  •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해 고위공직자의 재산 공개와 퇴직공직자 취업제한 제도를 도입했으며,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에 대해서는 김영삼 본인의 재산을 먼저 공개하여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였다.
  • 또한 군사정권 시절 비밀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청와대 안가 12채를 모두 철거해 버렸으며, 청와대 안에 있던 대형금고도 뜯어냈다. 그리고 신군부 당시에 지어진 안가(安家) 12 채도 다 없애버렸다고 한다
  • 금융실명제의 전격 시행은 대한민국 경제에 있어서 큰 공로를 했다고 인정받는다. 갑작스러운 정책 시행으로 수많은 검은돈이 날아갔다. 
  • 김영삼은 이걸 철저히 숨기다가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에 예정에 없던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 후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전격 발표했고, 즉각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었다. 대통령의 비밀 지시에 따라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의 공무원 10여 명이 모 아파트에서 몰래 시행을 준비했으며, 대통령의 경제 교사였던 박재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에게도 비밀로 부치고 일으킨 일이었다.
  • 금융실명제 실시 여파로 차명계좌를 개설하는데 제한이 가해진 덕분에, 95년 하반기를 강타한 노태우 5,000억 비자금 사건이 나비효과처럼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차명거래가 가능하도록 여지를 남겨 두었기 때문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반쪽 금융실명제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라.  YS의 개혁성 보완을 위한 인재 영입

  • 1996년 15대 총선 앞두고 YS의 숙제는 JP와의 결별과 창당(자유민주연합)을 극복하고, 정계 복귀한 DJ의 영향력을 수도권에서 최소화시키는 것이었다. 
  • 이에 따라 1994년 민중당 출신 이재오ㆍ김문수ㆍ이우재 등 재야 운동권 인사들이 전격 영입됐다. 보수 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이들을 ‘영입 1호’로 성사시킨 것은 파장이 컸다. 보수층 일각에서는 우려도 나왔지만, 총선을 앞두고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며 외연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됐다.
  • 이어 ‘모래시계’ 검사로 일약 대중 유명인이 된 홍준표 변호사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실장 출신의 정태윤 전 민중당 대변인도 영입해 기득권 이미지를 완화했다. 이들은 모두 서울 등 수도권에 배치돼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차단하는 선봉이 됐다. 
  • 이후 총선을 앞둔 1996년 초에는 개혁 전도사로 수도권에서 인기가 높았던 박찬종 변호사에 이어 이회창ㆍ이홍구 전 총리 등 보수층뿐 아니라 중도층에 어필하는 거물급 인사를 영입했다.

 

   

 

  마.  민자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 1990년 2월 9일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여 거대 여당으로 탄생하였다. 1992년 김영삼을 후보로 내세워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집권에 성공하여, 당의 주류가 민정계에서 민주(상도동)계 이동하면서, 당내 계파 분열과 투쟁은 점점 노골화되었다. 
  • 신한국당 : 1995년 6월 27일 제1회 지방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구 공화계가 탈당하고, 민자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11월과 12월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신군부의 흔적이 강한 민주자유당이라는 당명을 버리고, 김종필의 공화계가 자유 민주 연합을 창당하고, 일부 민정계가 이탈한 상황에서 재야 세력을 영입하고 김영삼의 민주계를 중심으로 신한국당으로 당 이름을 바꾸었다.
  • 한나라당 : 그러나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와 반(反) 이회창의 비주류가 대립하는 등 내분이 심하였고, 급기야 1997년 IMF 환란이라는 국가 위기로 인해 1997년 11월 21일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4.  정권창출에 실패한 이회창

가.  이회창의 신한국당 신임총재 추대

 

 나.  이회창의 한나라당

  •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약 1개월 앞둔 1997년 11월 21일 합당 전당대회에서 신한국당은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 겸 명예총재로, 조순 민주당 총재를 초대 총재로 선출했고, 이를 통해 민주당과 합당을 하게 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변경했다. 
  • 하지만 한나라당은 이회창 후보가 15대(1997년 12월), 16대(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잇달아 패배하면서, 10년간의 야당을 경험하게 되었다.
  • 그런데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공천 물갈이를 통하여 한나라당은 2000년의 제16대 총선에서 승리하여 일거에 여소야대로 만들어 놓았으며, 이어 2002년 지방자치제 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 이회창이 물러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키고,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는데, 이는 2004년 4월 15일 총선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었고, 한나라당에게는 부메랑이 되었다. 탄핵사태로 민심을 잃은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 우리당에 패배했고, 탄핵소추안도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면서,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다.  차떼기 정치자금

  • '차떼기'란 기상천외한 발상은 누가 했을까?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비롯한 양측 캠프가 삼성·SK 등 대기업으로부터 불법 대선자금을 받은 사실이 2003년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한나라당 823억여 원, 민주당 113억여 원). 
  • 특히 한나라당의 돈 받는 방식이 창의적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약 250억 원이 담긴 차량(트럭·승합차)의 키를 넘겨받은 뒤 이를 차량 채 가져간 것. 
  • 국민의 정치혐오와 불신은 극에 달했고, 한나라당은 오래도록 '차떼기당'이라 불렸다. 이회창 후보는 "제가 책임자"라고 했지만, 최측근 변호사만 감옥에 갔다. 현 정치자금법 뼈대가 만들어진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