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극우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가. 극우 개신교의 등장
- 개신교 교회 선교사와 목사들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교육·자선사업에 앞장섰고, 해방 후에도 민주화·인권·노동·농민·빈민·시민운동의 최전선에서 고난을 자청하며 십자가를 졌다.
- 목사의 정당 참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보수 기독교의 뿌리인 영락교회 설립자 한경직 목사는 1945년 9월 신의주제2교회 목사로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한다. 이후 북한에서 목사와 장로들은 공산당에 숙청을 당하거나 교회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월남한다.
- 공산당을 증오하는 월남 기독교인들은 한국 기독교의 원조 격인 미국과 한국을 개신교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 등 반공·극우·친미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삼각편대를 형성한다.
- 1947년 영락교회에서 월남 크리스천들이 주축이 돼 출범한 ‘서북청년단’은 이승만 독재를 떠받치기 위해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암살했으며, 민간인을 빨갱이로 몰아 몰살하는 데 앞장서는 전위부대 구실을 했다. 이에 따라 일제가 남긴 적산가옥을 불하받는 데 개신교회가 최대 수혜자가 됐고, 한국전쟁 뒤 미국 구호물자의 최대 공급 통로가 되는 등의 혜택을 누렸다.
나. 정치와 손잡은 극우 개신교
- 반공과 친미, 친독재로 급성장한 보수교회는 박정희 정권의 전위부대도 자처했다.
-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은 “1970년대 군대 내 종교시설에 가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신앙 전력화’와 ‘전군의 신자화’라는 두 개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유신정권은 신앙을 전투력으로 삼으려 했고, 교회는 그 욕망에 호응하는 대가로 전군을 신자로 만들려 했으며,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의 동반 성장을 꾀했다”고 설명했다.
- 정 원장은 “군사독재 정권은 반공 정권이었기에 (보수 목사들이) 길거리에 나설 필요가 없었는데, 김대중 정권 이후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한반도 평화 무드가 조성되면서 비로소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길거리 우파’로 나서게 됐다”며 “근본주의 교회의 이런 행동은 1990년대 이후 개신교의 성장이 둔화하고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함에 따라 외부의 적에 대한 적대와 혐오를 부추겨 내부를 더욱 단결시키는 효과를 얻기 위함이었다”고 분석했다.
다. 한국기독교 총연합회(한기총)의 정치 세력화
- 조용기·김준곤 목사 등 대형교회와 보수 목사들이 한국기독당을 만든 것은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 2004년 총선을 앞두고서였다.
- 대형교회 목사들과 전광훈 목사 등이 만든 정당은 매번 ‘정당 득표율 3% 이상’을 얻는 데 실패해 국회 진출이 좌절됐다. 그러나 2008년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총동원령을 내려 이명박 대통령 탄생을 돕는 등 정치권력의 확대재생산은 계속했다.
- 지난 2020년 8·15 광화문 집회 때도 보수 목사들과 행보를 같이하는 대형교회 장로들이 주축이 된 ‘대한민국 장로연합회’가 인원 동원에 앞장섰다. 즉, 전광훈 목사의 등장은 분단 상황을 유지해 교회 기득권을 지키고 정치권력까지 쥐락펴락해온 대형교회 극우 목사들에서 파생한 셈이다.
- 황영익 전교회2.0목회자운동 실행위원은 “반공·반이슬람·반동성애를 3대 혐오전략으로 삼는 이들의 방식은 마치 나치가 반공·반유대·반소수자·게르만주의 광기로 혐오를 자극한 기법과 유사하다”고 짚었다. 전 기독자교수협의회장 이정배 목사는 “극우 목사들과 전 목사의 삐뚤어진 욕망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코로나 정국’을 벗어나면 극우교회에 의한 ‘꼬리 잇기’가 본격화해 전 목사와 다시 한통속이 되리라는 전망이다.
참고) 개신교 연합 기구의 청치색
- 한국의 개신교 중 보수주의 성향의 연합단체며 약칭은 '한기총'이다.
-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 협의체였으나 201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 탈퇴하면서 한국 최대의 교회 협의체의 자리를 잃게 되었다. 법률상 상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민법상의 적용을 받는 사단법인으로 등기소 관할은 서울중앙지방법원 중출범 이후부터 20년 정도는 한국의 대표적인 개신교 연합이라고 불릴 만큼 영향력이 있었으나,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군소교단 위주로 남았다. 이후 껍데기만 남은 한기총을 접수한 전광훈 전 대표회장의 만행으로 인해,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제는 힘없는 몇몇 군소교단만이 남아있는 단체로 전락해버렸다.
- 전광훈 전 대표회장이 제명되고, 극우적, 정치적 색채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하도 큰 논란을 불러온 전광훈 덕분에 나락간 이미지가 쉽게 회복이 되고 있지는 않다.
한국기독교 총연합회(한기총)의 역사
- 설립된 것은 1989년이지만 사실 한기총의 뿌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는 가운데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을 중심으로 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삼선개헌을 반대하자, 개신교계 일각에서는 "국가의 안정을 위해 삼선개헌을 지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개신교계의 입장은 둘로 갈려 기장과 NCC는 삼선개헌반대운동을 벌였고, 반대로 주류 교단들과 목사들은 삼선개헌 지지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한기총은 NCCK와 사이가 좋지 않다.
- 이때부터 군부독재 정권을 둘러싸고 한국의 개신교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서로 상반된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에 우호적이던 교단들이 NCCK로 결집한 것과는 달리, 주류교단들은 정기적으로 국가조찬기도회를 개최하면서 독재정권과 밀착하긴 했어도 이렇다 할 연합 단체를 만들지는 않았다. 현실 문제와 거리를 두고, 개인선교에만 집중하던 상당수 교단도 마찬가지. 이것은 1980년대까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과 맞물려서 한국 개신교도 폭발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각자 교단별로, 교회별로도 잘 나가는데 굳이 뭉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그러던 중 1989년 한국교회협의회가 인천에서 통일 선언을 발표하려 했고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하면서 개신교 내에서 통일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또한 사회주의와 연관되어 사회를 변혁하려는 사회복음이 유입되었다. 이에 반발한 주류 보수 교단들이 연합단체를 구성하기로 하여 결성된 것이 바로 한기총이다. 초기부터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 등 사회공헌활동을 이어오기도 했다.
- 한기총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미국식 기독교 우파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방하면서 김대중 정부-노무현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에 한기총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노무현 정권 때는 대북정책을 비롯해 사립학교법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기총의 보수 성향은 큰 비난을 받았고, 되려 조갑제를 비롯한 보수들은 한기총을 좋아라 하면서 우파 정치권과 유착관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정치인들과 대놓고 붙는 이들이 이런저런 행정문제를 일으킨다. 이 때 이후로 어지간한 교단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2010년대 초반에 이 현상이 극에 달했다.
- 2019년 전광훈 목사가 총회장에 취임한 이후 정교유착관계는 더욱 심해졌는데 한때는 극동방송 김장환 대표와 더불어 노골적으로 황교안에게 올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명박 이후로도 장로 정치인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한 듯.
- 전광훈 취임 이후 바닥이 보이지 않는 막장행보를 보여주고 있는데, 신사도 운동 논란으로 기성교단에서 이단시하는 사랑하는 교회의 담임목사 변승우를 영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결국 전광훈의 도움으로 복권된 변승우는 한기총 공동회장 자리에 올랐다. 전광훈 혼자 한 것이 아니고 길자연 등 몇몇 전 총회장도 이에 동참했다.
- 전광훈 회장의 막말 논란으로 한기총이 주요 언론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이 때문에 사실상 마지막 주요 교단이었던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도 연합회에 대해 행정 보류를 결정하며 군소 쩌리 교단의 연합체가 되고 말았다.
출처 : 나무위키
라. 서북 청년단의 결성
- 미국 유학파 한경직은 소련군을 탄압을 피해 월남 1945년 12월 베다니 교회 설립
- 반공주의의 선봉 목사로 공산주의는 악마로 표현, 이승만의 공산주의 혐오정책과 상봉
- 1946년 서북청년단 결성, 국방경비사관학교 대거 입소 → 향후 경찰 수뇌부, 육사 5기, 7기, 8기(박정희 혁명 주역)
- 군대는 서청중대, 경찰에는 서북청년단이 구성 → 제주 4〮3 항쟁 토벌,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주역
- 오제도 검사, 채명신 장군, 이세호 장군은 영락교회 장로
2. 권력과 함께 길을 걸어온 국가조찬기도회
가. 친미와 반공의 기독교의 역사적 뿌리
① 친일잔재 청산 못한 개신교의 생존전략
- 개신교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친미 반공에 기댄 주된 이유이며, 대다수의 교단이 일제의 압력에 굴복해 신사참배에 앞장서는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교회는 해방 후에도 친일문제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 친일파들이 생존을 위해 기회주의적으로 기생하였던 반공에 교회도 기댈 수밖에 없었다
② 미군정의 특혜와 전쟁의 경험으로 고착화
- 한국 개신교, 특히 '보수 근본주의' 세력은 해방 이후 미군정의 친개신교 정책과 한국전쟁의 경험을 통해 친미와 반공을 체질화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선교사들의 추천을 받아 개신교인들을 군정청의 고위직에 대거 포진시키고 일본종교 재산을 개신교 예배당으로 전환해 특혜를 베풀었다.
- 상공업계층과 자본가 계층이 중심이었고 보수근본주의 성향이 강했던 서북지역 교회는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으며, 북쪽에서는 토지개혁으로 개신교의 물적 기반이 무너지고 일부 친일활동에 연루되었던 기독교인들이 처형을 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 두 가지의 상반된 경험이 충돌하면서 개신교인들은 미국이 은혜의 나라인 반면 북한은 상종 못할 집단이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 권력과 함께 길을 걸어온 국가조찬기도회
- 1966년 시작된 기도회는 1967년 2회 기도회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면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모임이 자신의 정책을 선전하고 종교인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는 중요한 모임으로 기능할 것을 알았기에 적절하게 이용했다. 그리하여 '국가조찬기도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라는 타이틀을 걸고 오로지 국가의 권력과 '야합'하는 길을 걸어왔다.
- 전두환 군부독재가 광주를 짓밟고 권좌에 앉았을 때에도 여전히 국가조찬기도회는 권력에 대한 칭송과 감사의 기도와 아부로 일관했다. 노태우는 불교 신자이기 때문이었는지, 국가조찬기도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탓인지, 개신교의 영향력이 떨어졌기 때문인지, 별로 이 기도회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국가조찬기도회의 위상이 떨어지긴 했지만, 해바라기 권력지향적인 목사들은 국가조찬기도회에 초대받고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 장로인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자 국가조찬기도회는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했고,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은 종교는 달라도 이 기도회에 참여했다. 큰 틀에서 개신교가 국가를 위해서 이런 일들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선에서의 축사 형식이었다.
-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뒤 달라졌다. 국가조찬기도회는 심각한 권력지향적인 자신들의 속내를 부족함 없이 드러낸다. 2011년 제43회 국가조찬기도회에서는 유래없이 대통령 부부가 함께 강대상에 무릎을 꿇고 통성기도를 한다. 참석한 보수대형교회 목사들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 찬성하고, 노골적으로 지지하면서 마치 권력과 종교가 한 몸이 된 듯했다.
- 이명박 정권에서 치러진 선거에서도 보수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썼고, 십알단까지 등장시키면서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좌우의 대결, 이념의 전쟁터로 만들며 분열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3. 한기총의 극우 태극기 부대화
출 처 : 곰곰이 유튜브 극우 개신교의 역사
가 . 한기총의 최근 활동
- 2012년 대선시 박근혜의 한기총 방문시 이강평 목사는 해외 지지자 확보를 위해 교회 연합을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발언
-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에서는 한기총은 더 이상 좌편향된 교과서로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할 수 없다고 주장
-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는 극우 개신교 지도자는 탄핵 반대 거리운동 전개 → 2017년 3.1 만세 운동 구국 기도회 + 탄핵기각을 위한 총궐기운동본부 집회
- 2019년 1월 전광훈 목사가 한기총 대표가 됨, 황교안 대표 한기총 방문 → 저와 자유한국당을 위해 기도 부탁, 1,000만 크리스찬들의 뜻을 모아 달라 → 자유한국당이 200석을 얻으면 나라를 바로 세우고 제2의 건국이 가능
- 2019년 9월 문재인 하야 범국민 투쟁본부 결성하여 10/3 부터 범국민 투쟁 대회 전개중 (전광훈, 이재오)
- 한기총은 이제 더 이상 한국교회 최대 기관이 아니다 → 한국교단의 21% 한국교인의 3%으로 전락, 극우 성향의 일부 개신교
4. 한국 교회, 노골적인 윤석열 후보 지지 선언 ( 故조용기 빈소에서)
- 2021년 9월 16일 교계에 따르면 윤 전 총장은 전날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1층에 마련된 조 목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이어 빈소를 지키던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 김삼환 명성교회 원로목사, 오정현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오정호 대전 새로남교회 담임목사 등 교계 내 영향력 있는 이들과 차례로 악수를 하며 인사했다.
- 이 자리에서 김장환 이사장은 윤 전 총장 어깨를 치며 "하나님 믿어야 돼"라고 강조했고, 윤 전 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표정을 보였다. 이어 이들 목사는 윤 전 총장 어깨에 다 함께 손을 올린 채로 단체 안수기도를 시작했다.
- 오정호 목사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윤석열 믿음의 가족 되기를 원한다”며 “우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지켜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며, 대통령 후보로서 지혜와 명철을주시사 한국교회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고 우리 민족 역사를 새롭게 하게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모든 만남과 지혜가 뜻 되어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이어 “국민들의 마음을 얻게 하도록 솔로몬의 지혜로 일깨워달라”며 “윤 후보의 귀한 가정과 자녀들, 가족에게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모든 일이 순전하게 이뤄지도록 복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 김장환 이사장은 기도가 끝나자마자 윤 전 총장의 어깨를 재차 강하게 두드리며 “이제 하나님 믿어야 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출 처 : 연합뉴스 2021.09.21
극동방송 김장환 이사장, 전두환 12·12 군사 반란 주역들과 오찬
-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12·12 군사 반란 주역들과 오찬을 즐겨 논란이 일고 있다. 군사 반란이 일어난 날로부터 40년이 되는 12월 12일, 김 목사는 서울 강남의 고급 식당에서 전두환 씨 내외 등과 2시간 정도 식사했다. 김 목사는 전 씨에게 "각하께서"라는 표현을 써 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 해당 영상을 공개한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는 기자회견에서 "군사반란죄로 대법원에서 유죄까지 확정받고 사형을 언도받은 전두환 본인과 당시 쿠데타를 함께 공모했던 최세창·정호용 등이 자숙하고 근신하고 반성해도 모자라는데 기념 오찬을 즐겼다"고 비판했다.
- 전 씨 측은 이와 관련해 "12·12 사태와 전혀 무관한 친목 모임으로, 일정이 바쁜 김장환 목사 사정으로 우연히 날짜를 정했다"고 해명했다.
- 김장환 목사와 전두환 씨는 수십 년간 각별한 사이를 유지해 왔다. 김 목사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 씨에게 부탁을 받고 광주로 가 동태를 살핀 바 있다. 자신의 저서 <섬기며 사는 기쁨>(나침반)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 끝까지 비판하고 나쁘게 말하는 것도 편협한 일이다. 한 인간을 어떤 사건 때문에 끝까지 미워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중략) 광주 문제로 감옥에도 갔다 오고 사과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외면하고 저주하면 친구가 되지 않는다"고 두둔하기도 했다.
출 처 :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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