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민국 수립 과정
📌 해방과 초기 정세 (1945년 8월 15일)
- 대한민국이 해방된 날(8월 15일)을 두고 "독립"이 아닌 **"해방"**이라는 표현을 선호함.
→ 이유: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는 진정한 독립이 아니기 때문. - 해방 직후, 사람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이는 대한제국(1897년~1910년)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의미로 사용됨.
- 그러나 해방을 미리 알고 준비한 인물이 있었음 → 여운형
→ 일본 총독부의 정무총감(엔도)가 여운형을 찾아와 정권 이양을 논의하면서 조선의 독립이 예상되었음.
→ 일본인들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정권 이양 협상을 진행.
📌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조선인민공화국(인공)
- 여운형, 해방되자마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여 전국적인 행정과 치안을 담당.
- 곧 **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 발전하며, 이승만을 주석으로 임명했으나 이승만이 거부.
- 그러나 **미군정(1945.9.9.~1948.8.15.)**이 시작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은 공식 인정받지 못함.
📌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차이
- 미군정(남한, 9월 9일 시작)
- 미군정이 발표한 맥아더 포고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점령 상태이며 모든 권한은 미국에 있다"는 내용이 포함됨.
-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고 인식함.
- 소련군정(북한, 8월 24일 시작)
- 소련군이 발표한 치스차코프 포고문은 **“우리는 해방군”**이라고 명시함.
-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인민위원회"**가 조직됨.
🔎 결론:
→ 미군은 점령군처럼 행동했지만, 소련군은 북한에서 친소 정권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음.
→ 남북한의 통치 방식이 이 시점부터 차이를 보이기 시작.
2. 미소 갈등과 신탁통치 논란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1945.12)
- 미국, 영국, 소련이 한반도를 최대 5년간 신탁통치 후 독립시키자는 안을 논의.
- 동아일보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오보를 내면서 큰 논란이 발생.
→ 실제로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소련은 즉각 독립을 원했음.
→ 하지만 이 오보로 인해 한국에서는 소련=나쁜 나라, 신탁통치=반대해야 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됨.
📌 찬탁(사회주의 진영) vs 반탁(우익 진영) 대립
- 사회주의 계열(여운형, 박헌영 등):
→ 신탁통치라도 받아들이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 - 우익 계열(이승만, 김구 등):
→ 신탁통치는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즉각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 -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가 오판이었음을 깨닫고 입장을 바꿈.
📌 미소공동위원회(1946~1947)
- 남북한 총선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했으나 결렬됨.
- 이유:
→ 소련은 반탁 세력과는 협상할 수 없다고 주장.
→ 미국은 모든 정치세력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
→ 결국 협상이 실패하면서 남북한의 정치적 대립이 심화됨.
3.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
📌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6.3)
- 처음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발언.
-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으니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자.”
- 김구는 이에 반발하며 이승만과 결별하고, 남북협상을 추진.
📌 UN과 남한 단독선거(1948.5.10)
- UN이 "남북한 총선을 치러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소련과 북한이 이를 거부 → 남한에서만 단독선거가 진행됨. - 사회주의 세력과 김구, 김규식 등은 선거 불참.
- 선거 결과: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이 주도.
📌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
-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이 아니라 "정부 수립"이라고 보는 이유:
→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했기 때문.
📌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1948.9.9)
- 김일성도 "남한이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했다"는 명분을 만들어
9월 9일 북한 정권을 수립. - 이로써 한반도 분단이 공식화됨.
4. 통일 문제와 역사적 평가
📌 분단의 책임
- 미국과 소련: 한반도를 전략적 이해관계로 나누면서 분단을 초래함.
- 이승만: 단독정부를 추진하며 분단을 가속화함.
- 김일성: 북한 정권을 수립하며 분단을 확정함.
📌 김구의 마지막 호소
- 김구는 단독정부를 막기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으나 실패.
- “나는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
→ 결국,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분단이 확정됨.
5. 결론 및 황현필 강사의 시각
-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분단의 책임이 단순히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강조.
- 만약 남북이 통합된 정부를 구성했다면 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
- 그러나 결국 대한민국 중심의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음.
📌 요약 정리
- 해방 직후(1945): 여운형이 건준과 인공을 세웠지만 미군정이 이를 인정하지 않음.
- 신탁통치 논란(1945~1946):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했으나, 한국에서는 거꾸로 알려짐.
- 남한 단독정부 수립(1948):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추진하면서 분단 가속화.
- 북한 정권 수립(1948.9.9.): 김일성이 북한 정부를 수립하며 분단이 확정됨.
-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 그러나 분단의 책임과 그 과정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필요함.
📢 이 강의의 핵심 메시지
-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역사는 단순히 흑백논리로 볼 수 없다.
- 분단의 책임을 제대로 평가하고, 미래의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출 처 : ChatGPT 4.0
대한민국은 어떻게 수립되었나? - 여운형, 김구, 이승만 그리고 김일성까지...황현필 한국사 2024.1.30
https://youtu.be/rjvu0LTKrk4?si=51c1XAq5cBC2WH-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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